⑬ 용인의 옛길 양벽정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⑬ 용인의 옛길 양벽정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 이건식(국어국문) 교수
  • 승인 2011.03.15 17:25
  • 호수 1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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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 용인의 옛길


양벽정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용인 양벽정(    碧亭)의 아름다움은 오늘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홍귀달( 1438~1504)은 「양벽정기」에서 1497년(홍치 10)에 용인 현감으로 부임한 김후가 양벽정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또 홍귀달은 영남쪽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용인의 연못을 보았는가”라고 반드시 물어, 정자의 반이 연못 위에 세워진 양벽정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주의 영릉을 배알하고 환궁하던 중종 대왕이 1528년(중종 23)년 10월 17일에 양벽정에서 양로연을 베풀게 되면서, 양벽정은 영광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이황(1501~1570), 조목(1524~1606), 구봉령(1526~1586), 조정(1555~1636) 정경세(1563~1633), 오숙(1592~1634) 등은 영남 출신의 사대부로 용인에서 유숙하면서 양벽정을 소재로 한시를 지었다.


한양에서 용인은 하루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영남 지역 여행객들이 용인에서 하룻밤 유숙할 수밖에 없었고, ‘푸르름을 물위에 띄운’ 양벽정의 그윽한 정취가 조선 시대 사대부 문인들의 시심(詩心)을 자극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용인 객관 동편에 소재했던 양벽정은 지금은 사라져 아쉬움을 남긴다. 미인박명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은 지키기 어려운 일이다. 


1759년에 작성된 「여지도서」 용인현의 누정(樓亭) 조에는 누각과 정자가 없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양벽정을 보면서 시를 지은 한시 작품으로 가장 후대의 사대부가  지은 것은 오숙의 「숙용인양벽정 차벽상운(宿龍仁      碧亭 次壁上韻)」이다. 이 한시에는 ‘청주로부터 명나라 사신 강일광과 왕몽윤의 제술관으로 왕명을 받아 상경할 때 지었다’는 주석이 있다. 강일광과 왕몽윤은 1626년(인조 4) 6월 13일 명나라 황제의 칙서를 조선에 전달한 사신이었다. 따라서 양벽정은 1626년(인조 4)까지 실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형원(1622∼1673)의 작성 연대 미상 『동국여지지』의 용인현 누정 조에 신정(新亭)과 양벽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동국여지지』의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가져온 것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1626년 이후와 1759년 이전의 어느 시기엔가 양벽정은 허물어진 것이 된다.


약 130여년 동안 양벽정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양벽정을 파괴한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는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과 1728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관련 자료가 전하지 않아 양벽정 파괴의 이유를 자세히 말할 형편이 아니다.


오늘날 양벽정이 있었던 위치를 구성동 주민센터 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이러한 추정은 신빙성이 높은 것이다. 구성동 주민센터는 북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의 동쪽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귀달의 「양벽정기」에 말한 양벽정의 위치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양벽정기」에서 양벽정 연못의 물은 ‘북쪽에서 흘러내리는 산골 샘물을 끌어서 동쪽으로 인도하고, (객관의) 담을 뚫어서 마당 안 못에 흘러든 것’이라고 하였는데, 구성동 주민센터가 자리한 위치와 매우 유사하다.


구성동 주민센터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영남으로 가는 길이 지나고 있다. 황윤석(1729~1791)은 『이재난고』에서 용인 연원마을에서 용인 삼가동까지의 영남으로 가는 길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閱兒院[녀
원, 지금의 연원마을]에서 10리를 가서 용인읍내 점사(店舍, 주막)에 이르고 이곳에서 동쪽으로 5·6리를 가다가 남쪽을 향하여 직곡 점사에 이른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연원 마을에서 구성 우체국 앞길을 지나 동향하다가 천덕1교에서 남향하는 길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황윤석이 말한 용인읍내 점사는 현재 구성우체국 인근의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용인에서 한양까지 하루거리이므로 영남으로 내려가거나 한양으로 상경하는 여행자들은 용인 읍내에서 유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건식(국어국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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