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터치 ③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시사터치 ③ 동일본 대지진 현장에서
  • 강내원 교수
  • 승인 2011.03.22 20:48
  • 호수 12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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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여, 부디 힘내라!



  2011년 3월 11일 오후. 나는 집에서 온라인 컨퍼런스 콜을 통해 해외에 있는 동료들과 회의 겸 유쾌한 잡담을 막 끝내고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순간, 집이 조금 흔들렸다. 도쿄생활 7개월에 진도 2~3 정도는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정도가 됐으니, ‘또 지진인가’ 했다. 그런데 목조로 된 집이 점점 요동을 치며 심한 소음을 냈다. 한 차례 큰 지진이 지나자마자 딸을 데리러 간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여진으로 집은 간간히 크게 흔들렸고, 극도의 불안감으로 우왕좌왕 했다. 바닥에 떨어져 고장난 벽시계는 정확히 2시 46분에서 멈춰 있었다. 인터넷전화로 겨우 연락이 닿은 가족들은 4시경에야 집으로 돌아왔고, 딸애는 날 보자마자 안도의 울음을 터트렸다. 아내가 목격한 진도 5의 도쿄는, 도로가 좌우로 크게 움직이고 고층 건물들은 엿가락처럼 흔들리고, 행인들은 어지러움으로 몸을 가누기 힘들어 주저앉아 있었다고 한다. 딸애의 학교에 도착했을 때는 교사들의 인솔에 따라 학생들이 헬멧을 쓴 채 피난장소로 이동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불과 이틀 전에 지진대비훈련을 했던 학생들이 끔찍한 실제상황을 만난 것이었다.

 


  동일본거대지진(東日本巨大地震)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대지진을 보도하며, 숨가쁘게 여진과 쓰나미 경보를 계속 내보내고 있었다. 지진과 쓰나미로 엄청난 재난을 맞은 미야기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지진을 겪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녁시간이 돼서야 비상식량을 좀 준비해둬야겠다는 생각에 동네 편의점으로 향했다. 물이나 간편음식들은 이미 많이 팔려나간 상태였다. 대중교통수단이 일시에 멈춰 버려, 평소 조용하던 거리에는 걸어서 귀가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런데 묘했다. 이런 대규모 지진은 일본인들도 처음일텐데, 모두들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고 차분했다. 밤이 되자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는데, 밤사이에 휴대전화로 지진 경보가 두 번이나 울려 눈 붙일 틈이 없었다. 일본은 2007년부터 진도 4이상의 지진에 대해 휴대전화로 알려주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대지진 다음날 아침의 도쿄 모습은 놀라웠다. 여느 때와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신문과 우유가 배달되고, 쓰레기 처리도 제때 이루어지고,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모습도 여느 주말 때와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언젠가는 올 지진이 이제 왔다고만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불안을 애써 감추려는 것일까? 여진은 수시로 이어졌지만, 도시가 많이 안정을 찾았다고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럴 즈음 우려했던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 사고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전세계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우리 가족은 며칠 지나지 않아 정든 도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 차창을 통해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쿄의 모습과 시민들의 차분한 일상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많은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귀국하는 것인지라 마음 편치 않았지만, 솔직히 안도의 한숨이 나온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간 불안감속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일주일이 넘게 혼돈 속에 있는 현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온다.


  지진이 발생한 지 이제 10일이 지났다. 일본인들이 지금 보이는 불안과 충격과 혼돈은 지진이나 쓰나미 때문이 아니다. 그 이후 발생한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사고 때문도 아니다. 그보다는 정부나 도쿄전력의 재난 대처방식이나 후속조치에 대한 불신과 원망에 기인한다. 천재(天災)가 인재(人災)로 연결되는 극한의 위험성을 그들이 인지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은 놀라우리만큼 질서를 유지하고 있고 감정도 억제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인내이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인의 혼네(本音: 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 겉모습)를 말하며, 그들의 이중성을 비꼬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대부분 그런 이중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평소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전체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 대부분은 메이와쿠(迷惑: 남에게 폐 끼치기)를 무엇보다도 싫어하며, 오모이야리(思い遣り: 남의 마음 헤아리기)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의 경험이긴 했지만, 일본인의 다테마에는 부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며 개인적 차원보다는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봤다. 그들의 다테마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공동체적 사회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관계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려는(배려해야만 하는) 마음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재난극복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보이는 행동을 보면 내 생각이 그리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상해보라. 눈앞에서 일어난 엄청난 재해에 비명에 간 사랑하는 가족들에 대해 맘놓고 흐느끼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고통 받는 이들이 더 안쓰럽다. 그냥 마음 아픈 대로 아파하라. 일상의 오모이야리가 극한 상황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게 솔직히 우리의 기준에서 봤을 때 초현실적이기조차 하지 않은가.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일본에 대해 애증(愛憎)의 감정이 있다. 아무리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과거 역사, 독도나 교과서 문제 등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애증의 한일관계를 논할 때는 아닌 것 같다. 전세계인이 일본을 향해 인간애를 보여야 할 시점이다. 같은 세계의 일원인 그들을 향해 전세계인이 오모이야리의 정신을 발휘할 때인 것이다. 일본인들이여, 부디 힘내라.
            

   강내원 (커뮤니케이션학부·게이오대학교 방문교수) 교수

 

강내원 교수
강내원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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