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② 헐벗은 산을 보며 울창한 삼림을 꿈꾸다
[신오도답파여행]② 헐벗은 산을 보며 울창한 삼림을 꿈꾸다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3.22 20:55
  • 호수 12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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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산을 보며 한탄하다

2. 헐벗은 산을 보며 울창한 삼림을 꿈꾸다
 

  이광수가 이용한 공주 행 ‘신작로’는 오늘날 1번 국도와 32번 국도를 경유하는 길이다. 일제강점기 이 길은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도로였다. 조선총독부는 1등, 2등, 3등, 등외로 조선의 도로로 구분 관리했다. 이 중 1,2등 도로를 총독부가 직접 관리하는 도로였으며, 1등 도로는 경성과 도청 소재지, 군사령부, 개항지, 주요 철도역을 연결했다. 일제는 1907년부터 한반도의 여러 지역에서 근대적인 도로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조선시대의 대로 체계와 다른 노선으로 길을 닦았다. 조선시대 한양과 공주를 연결하는 제7로인 삼남대로(증보문헌비고 참조)는 ‘천안-차령-공주-부여-강경’을 축으로 했지만, 일제는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지나가는 도시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도로의 축을 변경했다.


  오늘날 1번 국도에 해당하는 이 길은 ‘천안-조치원-대전-논산’으로 경유하면서 공주를 비껴간다. 이 길을 닦을 때까지만 해도 ‘대전’은 ‘공주목’과 ‘회덕현’, ‘진잠현’의 여러 군현에 속해있던 지역이었다. 1907년 통감부는 조선 지배의 효율성을 위해 주요 도로를 수축하는데, 이 때 만들어진 ‘소정리-공주’간 1등도로가 ‘조치원역’과 ‘공주’를 연결하는 신작로이다. 그렇지만 이 길은 충남도청이 있는 ‘공주’ 시내를 지나가지 않았다. 종착지를 ‘공주’라고 표기한 이유는 도로가 지나가는 ‘유성(현재의 대전시 유성구)’이 ‘공주목’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도청소재지가 있는 ‘공주’ 시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로를 개설해야 했다. 이에 따라 통감부는 1908년 2기 도로개설사업 구간으로 ‘공주’와 충북도청 소재지인 ‘청주’를 잇는 2등도로 건설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경부선의 조치원역에서 동서 방향으로 ‘공주’와 ‘청주’를 연결하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이광수가 이용한 신작로는 ‘조치원’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이 길이다.


  그는 이 길에서 벌거벗은 산을 보며 한탄한다. 지각없는 조상들이 나무를 마구 남벌하는 바람에 민둥산이 되었다고 탓한다. 반면 일제의 조림사업에 대해서는 문명부국으로 가는 필수사업으로 생각한다. 신작로의 가로수로 심어진 아카시아에서 그는 녹색삼림이 울창하게 우거지는 조선의 미래를 생각하며 상쾌해 한다. 그가 생각하는 조림사업의 방향은 일제가 의도했던 방향과 일치한다. 삼림조성을 통해 홍수를 예방하고, 이를 통해 미곡의 생산량을 늘리고자 했던 일제는 조림사업의 수목으로 생장이 빠른 수종을 택했다. 아카시아, 포플러, 백양나무 등의 수종을 조선의 산과 들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일제는 조선의 대표적 수종인 소나무를 ‘망국수(亡國樹)’라 칭하며 조림 수목에서 제외했다. 소나무는 병충해와 산불에 취약할 뿐 아니라, 생장 속도도 느렸기 때문이었다.


  산림전문가인 충남도지사에게 조림 계획을 듣고 그는 매우 기뻐한다. 그런데 도지사가 설명한 조림 계획은 식민 지배의 가시적 성과를 선전하고자 했던 일제의 의도를 담고 있다. ‘이십오 년으로 계획하고 있는 충남의 조림 계획에서 대전·연기·천안 등 철도가 지나가는 지역은 십년 안에 마치겠다’는 도지사의 발언은 이 사업의 전시적(展示的) 성격을 드러낸다. 일제의 조림사업은 지역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한 사업이 아니었다. 홍수 예방을 위한 사방(砂防) 사업이 주목적이다 보니 토질을 고려한 수종 선택은 배제되었다. 일제에 의해 새롭게 조성된 삼림은 식민지배의 타당성을 알리는 시각적 표상이었다. 그렇기에 전시적 효과가 강한 철도와 신작로 주변이 우선적인 조림지역으로 설정되었던 것이다. 여정의 첫 지점에서부터 느낀 그의 슬픔(발가벗은 산, 바짝 마른 개천,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를 보면 그만 비관이 생긴다)이 가로수로 심어진 아카시아를 보고 반전되는 상황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광수가 여행을 떠났던 1917년 여름, 조선에서는 전 해 겨울부터 지속된 심각한 가뭄 때문에 각지에서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는 가뭄의 원인도 삼림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말(산에 삼림이 없어지므로 점점 하천이 고갈하여진 것이다. 다시 삼림이 무성하는 날에는 하천도 부활할지요, 하천이 부활하는 날에는 만물이 부활할 것이다)한다. 그가 출발하는 7월 26일 중부지방에 많은 비가 내렸지만 가뭄을 해소할 정도는 아니었다. 금강도 수량이 부족해서 ‘공주’ 상류에 있는 ‘부강’까지 작은 배조차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새롭게 만들어진 교량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하천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광수는 이 상황을 조선인의 무지가 초래한 결과로 인식(조선의 불모(不毛)함은 순전히 주민의 죄얼(罪    )이다. 이미 죄얼을 자각하였거던 즉시 회개하여야 할 것이다)한다. 그는 지나치게 문명적 사명에 사로잡혀 가뭄도 봉건적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호도한다.


  오늘날 그가 ‘빨간 산 뿐이라’고 한탄했던 이 지역의 산은 다시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세종시 조성 공사로 삼림은 커녕 산조차 사라졌다. 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잿빛 구조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나무가 자라던 산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되었고, 파헤친 산에서 나온 흙은 논밭을 덮고 있는 중이다. 나무와 풀이 사라진 곳에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울창하게 들어설 것이다. 내륙 수운이 쇠퇴한 금강도 파헤쳐지고 있다. 개발을 문명의 척도로 여기는 한 무수한 산과 들과 강이 파헤쳐질 것이다.


  그와 함께 산과 들의 형세를 따라 만들어졌던 도로도 사라지고 있다. 토목 기술이 발달하면서 도로도 더 이상 산을 피하지 않는다. 산을 절단하고 뚫은 도로에서 우리는 수백 필의 말이 끄는 힘을 지닌 자동차를 몰며 앞만을 보며 질주한다. 이광수가 감탄했던 ‘신작로’보다 진화한 또 다른 ‘신작로(新作路)’들이 곳곳에 수축(修築)되고 있다. 이 도로에는 가로수조차 드물다. ‘조치원’에서 ‘공주’로 향하는 32번 국도에서 이광수가 꿈꾸었던 ‘문명 조선의 이상’이 실현된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전까지도 복숭아꽃이 만발했던 남면의 풍광만이 오롯이 떠올랐다.

▲세종시 첫마을아파트 건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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