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 ⑭ 이덕균과 삼일 만세운동의 영웅들
용인의 역사인물 ⑭ 이덕균과 삼일 만세운동의 영웅들
  • 김명섭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사학과)
  • 승인 2011.03.23 12:10
  • 호수 129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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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하늘을 자유와 독립의 함성으로 메운 사람들

⑭ 이덕균과 삼일 만세운동의 영웅들


3월 하늘을 자유와 독립의 함성으로 메운 사람들


대지진과 쓰나미, 핵과 방사능 유출로 공포와 눈물 속에 파묻힌 일본의 3월은 매우 비참하다. 평생 한 맺힌 절규를 쏟아내던 위안부 할머니들과 독도 지킴이 ‘반크’도 일본의 불행에 위로와 희망을 전하는 것은 역시 죄(제국주의)는 미워도 사람(민중)을 미워할 수 없는 인지상정 때문일 것이다.
지금부터 92년 전 1919년 3월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맞선 한국의 민중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 ‘찬란한 봄날’이었다. 약 3개월간 조선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가히 세계 최강의 군대에 맞서 싸운, 죽음의 항쟁 그것이었다. 전국 230개소에서 1,500여 건의 시위가 발생해 8천여 명 이상이 사망했고, 1만 6천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5만 3천여 명이 구속되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만세운동은 3월 21일 새벽 경기도 용인의 원삼면과 양지면 경계인 좌전고개에서 불타올랐다. 좌전고개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5일 이봉현 등이 원삼면 좌항리 이은표집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3월 20일 밤 양지면 평창리 도창 마을 최상근의 주막에서 모임을 갖고 산봉우리에 봉화를 피우며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21일 새벽 주막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내려온 일행은 인근 좌항리와 맹리 주민들과 합세하였다. 시위대는 원삼면사무소에 이르러 면장을 앞세우고 현 백암면 백암리에 있는 경찰주재소의 고개에 이르렀는데, 출동한 일본 헌병대원의 발포로 인해 강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후 용인의 만세운동은 읍내와 포곡면·기흥면·수지면·남사면·외사면 등 용인 전역에 걸쳐 남녀노소, 사농공상 구별 없이 참여하였다. 3월 30일 읍내에서는 2천명, 수지면에서는 1500명이 참여하였으며, 3월 31일에는 외사면에서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헌병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용인시민들의 항일투쟁은 그해 5월까지 13,200명이 참가하여 35명이 사망하고, 139명 부상, 500명 이상이 검거되었다.
광교산과 청계산을 병풍삼은 용인 수지구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28일 고기리 구장인 이덕균(李德均)과 안종각(安鍾珏)을 주축으로 전개되었다. 이날 두 사람은 마을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동천동으로 나아갔다. 만세행렬은 풍덕천동 면사무소 앞에 모여 소리높여 만세를 외쳤으며, 면사무소가 있던 마북동까지 나아가다가 일제 헌병들의 발포로 가까스로 해산되었다.
다음날에도 수지구 주민 1천 5백여 명은 현 구성면 방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쳐 구성면 언남동 도로를 가득 메웠다. 이에 당황한 일제 헌병들이 무자비한 발포를 가하였는데, 이로 인해 안종각과 최우돌(崔又乭)이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이러한 잔혹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수지구 주민들은 인근 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죽음을 무릅쓴 저항을 계속하였다. 일제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하여 많은 애국지사를 감옥에 가두고 가혹한 고문을 자행하였다. 이에 따라 고기리 구장 이덕균이 징역 1년6개월의 중형을 언도받았고, 김영석 등 수지면 주민 16명이 태형 90대에 처해졌다.
용인의 서북단인 기흥지역 역시 3월 30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악산과 청계산-광교산으로 이어져 서울과 수원-성남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인 기흥구에는 경주김씨(慶州金氏)와 한양조씨(漢陽趙氏)·한산이씨(韓山李氏) 등이 문중취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지역출신으로 대한제국 육군정위 출신으로 낙향해 있던 김혁(金赫)과 김구식 등은 농사일을 하던 중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30일 이른 아침부터 인근 마을주민 수십명을 모아 현 상갈동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인근에서 만세시위를 하며 현 구성면으로 몰려갔다. 시위대는 오후 2시경 구성면 군중과 함께 힘차게 만세삼창을 하였고, 다시 신갈로 향하던 중 용인헌병대의 총격으로 인해 강제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날 만세시위로 인해 김구식은 왜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의 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출감 후 수감생활 중 당한 고문으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다 광복을 맞이하던 해에 사망하였다. 기흥출신의 항일 독립지사로는 만주의 대한독립단과 상해 임시정부 재무부에서 활동한 이영선(李英善)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만세운동을 이끈 어대선(魚大善) 등이 있다.
비록 용인을 비롯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압살되고 말았지만, 3·1 만세운동은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고 있던 세계 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에 불을 당긴 세기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폭력으로 제국주의 총칼에 맞서 싸운 용인사람들을 비롯한 모든 한국인의 독립 정신은 곧 중국 대륙 전역으로 퍼져 5·4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필리핀의 독립운동, 인도의 비폭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나아가 이집트의 독립운동을 비롯해 영국과 혈투를 벌인 아일랜드의 독립 투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92년 전 이덕균을 비롯한 만세항쟁의 주역들이 보여준 용기와 희망의 몸짓처럼,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일본인들이 절망을 딛고 희망을 되찾길 응원해본다.  


 김명섭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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