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쇠락하는 고도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③ 쇠락하는 고도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 김재관 연구교수
  • 승인 2011.03.29 14:05
  • 호수 129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광수가 바라본 ‘공주’

 

③ 쇠락하는 고도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오늘날 이광수가 ‘공주’ 시내로 갔던 경로를 추정해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졌던 도로들 대부분이 확장, 노선 변경 등으로 본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1917년 6월 26일 이광수는 ‘공주’와 ‘청주’를 잇는 ‘공청가도(公淸街道)’를 운행하는 승합자동차를 타고 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북동쪽에서 ‘공주’로 가려면 반드시 금강을 건너야 했다. 오늘날은 금강을 가로지르는 5개의 교량(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웅진대교 제외)이 있어 편하게 건널 수 있지만, 그가 이곳을 찾았던 1917년 당시에는 교량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도답파여행」에서는 도강 장면이 없다. 조치원에서부터 타고 온 자동차에서 내려 배를 타고 건넜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전막(全幕, 공주시 신관동)’이나 ‘장깃대 나루(공주시 옥룡동)’에서 배를 타고 금강을 건넜을 것이다. ‘전막’은 1933년 금강철교가 완공되면서 나루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지만, ‘장깃대 나루’는 1960년대까지도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전막’은 ‘청주’를 잇는 2등 신작로의 출발지였다. 금강철교의 개통으로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지만, 개통 이전에도 자동차로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주’와 ‘조치원’의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산성교(山城橋)’라는 ‘배다리(舟橋 혹은 船橋)’를 만들어졌다고 한다. ‘산성교’는 25척의 목선을 이용해서 만든 가설 다리였지만, 자동차도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고 튼튼한 다리였다고 한다. 수량이 적은 겨울철에 임시 다리를 만들 정도로 이곳은 오가는 사람과 화물이 적지 않았던 곳이었다. 「오도답파여행」에 ‘공주’의 명물이었던 ‘배다리’가 빠진 것을 보니 이광수가 금강을 건널 때는 ‘산성교’가 없었나 보다. 이 다리가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설을 따른다면 이광수는 이 다리의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있었다 하더라도 여름철이라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


  조선시대 ‘전막’을 잇는 공주 쪽 나루는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있었다. 그런데 이광수가 도청방문 이후에 관람한 공산성에서 공북루를 처음 본 것처럼 묘사하는 내용으로 볼 때, 그는 공북루 아래를 거쳐 공주 읍내로 가지 않은 것 같다.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공주목’을 거쳐 북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공산성의 정문인 진남루를 지나 공북루 아래에 있던 나루에서 금강을 건넜다. 남쪽에 웅진원, 북쪽에 금강원이라는 원(院)이 있었을 정도로 번창했던 이 곳은 기호 지방과 호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였다. 그러나 공주 시내에 시내 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공북루 쪽 나루는 옛날의 영화를 잃게 되었으며, 금강 철교의 개통으로 나루의 기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공주’에 도착한 이광수는 짐을 풀기도 전에 충남도지사를 방문한다. 그는 도지사에게 들은 교육, 산업, 조림, 도로 개선 등 충남도청이 추진하는 사업 내용을 건조하게 기술한다. 이광수를 총독부의 기관지 좬매일신보좭와 좬경성일보좭의 기자로 만난 도지사는 친절하게 도정 현황과 계획을 설명한다. 도정 현황을 설명하고 관련 자료를 전달하는 일본인 도지사와 실무 책임자들은 이광수가 작성하고 있던 「오도답파여행」을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의 행정지원 지침을 따르면서도 좬매일신보좭에 소개된 충남의 행정현황이 자신들의 치적을 알리는 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인)’에 대한 묘사에 비하여 도정 소개기사는 들은 내용만을 개략적으로 기술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배의 방향을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피지배 식민지인이 그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었으리라. 그는 다른 도지사들에게 들은 내용도 이렇게 처리하며, 부득이하게 동의해야 할 상황에서는 완곡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광수가 찾은 충남도청은 봉황산 아래에 있었다. 이곳은 조선 선조 35년(1602년) 충주에 있던 충청감영이 이전하면서 선화당(宣化堂) 등의 건물이 들어섰던 곳이다.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전략적 요충지가 된 ‘공주’는 감영까지 이전하자, 4개 목 35개현을 관할하는 호서지방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육로와 수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공주’는 ‘한양’과 호남을 잇는 육로의 중심도시였으며, 금강 수운의 주요 경유지였다. ‘부강’에서 시작된 금강 수운은 ‘공주’를 경유하며 ‘부여, 강경, 군산’으로 이어졌다. 이 지역에 두 개의 원(院)이 번창했던 상황은 ‘공주’의 지정학적 위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백제의 유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이광수는 웅진 백제시기에 축성한 ‘쌍수산성(공산성의 다른 이름)’을 탐방하면서도 백제 문화를 도외시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로 부왕을 잃은 문주왕이 ‘공주’로 수도를 옮기면서 쌓은 ‘웅진성(공산성)’의 유래는 ‘역사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며 언급을 회피한다. 그가 인식하는 ‘공주’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이후이다. 그가 언급한 쌍수정, 영은사, 공북루, 진남문 등의 공산성 내 유적은 조선시대 축조된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공주’를 봉건왕조의 폭정을 상징하는 곳으로 생각(家屋에 瓦家가 드문 것은 五百年의 暴政을 表한 것이다)하며,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제가 구축한 근대 도시 ‘공주’의 모습에 감탄하지도 않는다. 상상봉에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패적비(敗蹟碑)를 보자는 일본인(中津氏)의 요구를 ‘피곤하고 배가 고프다’는 핑계로 거절하고, 비를 맞으며 ‘부여(夫餘)’로 떠난다. 그가 ‘공주’를 방문한 이유는 좬매일신보좭가 요구하는 각 도의 현황 취재 때문이었다. 도청 소재지임에도 도시의 규모는 작았고, ‘대전’에 밀려 쇠락하는 ‘공주’에서 그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1932년 충남도청이 오랜 공방 끝에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공주’는 호서지방을 통괄하는 중심지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2006년 ‘대전’으로 이전했던 충남도청을 다시 유치하고자 했지만, ‘홍성’이 새로운 도청 소재지로 확정되면서 실패하였다. ‘공주’의 쇠락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가 이곳을 지나가지 않을 때부터 예견되었다. 그러나 철도 교통의 비중이 낮아지고 도로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공주’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조선시대와 같이 호남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공주’를 경유해야 하며, 충남의 여러 도시는 ‘공주’에서 뻗은 도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쌍수산성으로 불려졌던 공산성.

김재관 연구교수
김재관 연구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