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 16. 약천 남구만과 용인
용인의 역사인물 16. 약천 남구만과 용인
  • 김태근(태성중 교사,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
  • 승인 2011.04.05 15:55
  • 호수 1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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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의 영수로 파란의 정치 역정을 보낸 남구만

약천 남구만과 용인


소론의 영수로 파란의 정치 역정을 보낸 남구만


조선 후기인 17세기와 18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나고 붕당정치가 격화된 파란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관료로서 또 정치인으로 살았던 남구만 역시 이러한 정치적 격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숙종 때에는 소론의 영수로서 다른 붕당에 맞서 치열하게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폈다.
붕당정치는 원래 의리와 명문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사림들이 학연과 지연을 매개로 의식과 정치이념이 같은 사람들끼리 붕당을 만들어 정치를 주도한 정치형태를 말한다. 이들은 특히 언론활동을 통하여 국왕의 신임을 얻어 국정을 주관하려 하였다.
붕당정치는 1575년 이조 전랑직을 두고 김효원 일파는 동인으로 심의겸 일파는 동인으로 갈라선 것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붕당정치는 인조반정과 예송논쟁을 거쳐 숙종 시기에 이르면 서인과 동인에서 분파된 남인 사이의 집권을 위한 정치적 갈등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남구만은 1629년(인조 7)에 외가인 충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이며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로 알려져 있다. 23세 되던 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 강원에 근무했다. 30세에는 사헌부 지평과 지제교를 지냈다. 특히 지제교 임명은 신진 관료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남구만이 세자시 강원에 있을 때는 송준길이 서연을 이끌며 조정을 장악한 시기였다. 실력있는 신진 관료였던 남구만은 송준길을 스승으로 받들며 그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관직도 대간직인 청요직에서 승승장구하여 홍문관 교리를 거쳐 이조 전랑에 올랐다. 물론 남구만의 관로에 있어서 스승인 송준길의 힘도 많이 작용했지만 고모부이며 삼학사중 한사람인 오달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보인다.
남구만의 관직생활은 순탄하게 이어졌지만 현실 정치에서 늘 원칙과 소신을 고수했다. 그가 이조전랑에 있을 때 이조판서가 장선징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하려 한 일이 있었다. 남구만은 “당하관을 청요직에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은 낭관에 있는데 저에게 묻지 않고 곧바로 거명하는 것은 제도에 어긋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원칙과 자신의 소신을 들어서 직속 상관이자 19살이나 많은 이조판서의 주장을 철회시켰다. 그 후 이러한 소신에 의한 당당한 행동은 임금 앞에서도 굽히지 않았다. 
남구만은 43세인 1671년 함경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678년(숙종 4)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남인이 장악한 사간원의 비판을 받아 결국 거제도를 거쳐 남해로 유배를 가야만 했다. 2년 후 경신환국에 의해 유배에 풀려 도승지에 임명되지만 모친상을 당해 사직하고 만다. 탈상 후 56세에는 우의정이 되어 드디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이어 59세에는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주도하였다.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수립되어 현 동해에 유배되어 1년간 머물다 용인의 비파담으로 돌아왔다. 그 후 용인이 화곡(남사면)과 결성 등지에 머물다 66세인 1694년 갑술환국에 의해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는 남인들에 대한 처리 문제로 서인들이 분화되자 온건론을 폈던 소론편에 섰다. 그가 소론에 간 것은 더 이상 정국을 파국으로 몰고 가서는  안된다는 원칙론과 벌열 귀족화된 노론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매부인 박세당과 함께 소론을 주도하며 영수의 지위에 올랐다.
1701년 장희빈에 대한 처벌을 놓고 소론의 입장에서 경형을 주장하다가 결국 사사되자 벼슬을 놓고 용인 비파담으로 낙향하였다. 이 후 결성과 비파담을 오가며 기거하다가 용인의 토전을 쟁송하는 일로 인해 용인을 떠나 거처를 옮겼으며 83세인 1711년 광주 율현을 거쳐 광나루 별서에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충이며 양주 불암산 화접동에 안장하였다가 9년 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하부곡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그의 사당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갈담리 파담마을에 별묘(別廟)를 세웠다가 후에 멸실되고 남구만이 낙향 후 우거하였다고 전하여지는 집에 별묘를 다시 세웠다. 숙종 묘정에 배향되었고, 강릉의 신석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무산의 향사 등에 제향되었다.
남구만의 저술로는 좬약천집(藥泉集)좭 등이 있으며 ‘좌상남지비’ 등의 글씨를 남겼다. 특히 좬청구영언좭에 전하는 그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너무 유명하다. 이 시조에 나오는 ‘사래 긴 밭’이라는 곳은 모현면 갈담리 비파담 인근의 장사래고개와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남구만이 벼슬을 놓고 용인의 비파담에 낙향하여 여유자적하며 주변 농민을 일깨우기 위해 지은 권농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좬약천집좭의 한시 ‘동명가’의 원시가 ‘동창이 밝았느냐’로 보면서 동해와 용인의 비파담 두 곳 모두 지어진 곳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김태근(태성중 교사,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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