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안처순(安處順), 『기묘제현수필·수첩(己卯諸賢手筆·手帖)』
(29) 안처순(安處順), 『기묘제현수필·수첩(己卯諸賢手筆·手帖)』
  •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1.04.12 14:36
  • 호수 12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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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로써 대하니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통한다

  퇴계는 조광조에 대해, “그의 개혁은 조금 지나친 데가 있었다. 당시의 사세(事勢)와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서 개혁할 수 있겠는가. 기묘년의 실패는 바로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논평하였다. 퇴계의 말대로 조광조는 무리하게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이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귀양을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거나 유배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들과 안처순(1492∼1534)이 주고받은 시와 편지를 모은 것이 『기묘제현수필』과 『기묘제현수첩』이다.  


  중종 13년(1518) 11월, 안처순은 남원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지방관을 희망하였다. 그는, “어머니의 연세가 높아서 기쁘나 한편으로 두렵다.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있으니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면서 중앙관직을 사양하고 지방관을 자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남원과 가까운 구례현감으로 가게 하였다. 이때 조광조를 비롯한 동료와 친구들이 송별의 뜻을 담아 안처순에게 시와 편지를 보냈다. 이 글을 모은 것이 『기묘제현수필』이다. 구례현감으로 내려간 이듬해에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안처순은 그 동안 외직(外職)에 있었기 때문에 무거운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이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묶어 『기묘제현수첩』이라 하였다. 뒤에 전라감사 조인영(趙寅永)은 안처순의 후손들이 명현들의 친필 글씨를 소장하고 있음을 감탄하고 국가적으로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원본을 보수하고 다시 장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판각하였으며, 1820년에 후손들이 펴낸 안처순의 문집 『사재선생실기』에도 수록하였다. 우리 대학에는 『사재선생실기』의 『수필』과 『수첩』이 소장되어 있다.  

▲안처순의 아들 안전이 아버지를 사모하며 지은 영사정(永思亭).

 『기묘제현수필』에는 모두 31편의 시와 편지가 실려 있다. 유용근은, “구례와 같은 작은 고을은 훌륭한 수령을 만나기 힘들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날로 살기 어렵다. 지금 작은 고을에 부임하는 것은 어버이에게는 효도가 되고 백성들에게는 매우 다행이다”라고 하여 효자만이 아니라 훌륭한 목민관이 될 것이라 칭송하였다. 정응(鄭膺)은, “서울에서는 인재를 잃었으나 남쪽 지방에서는 인재를 얻었다”라고 칭송하였다. 박세후는 “친구 간에 소중한 것은 신의로써 서로 대하는 것이니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은 통한다”고 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타내었다. 조광조는, “1년도 멀어 슬픈데 하물며 6년의 길을 떠나네”라는 시를 지어 이별의 정을 나타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귀양 가자 안처순은 주위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찾아가 만나보았으며, 귀양 간 친구들을 힘을 다해 도와주었다.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는 『기묘제현수첩』에 정리되어 있다. 김정(金淨)은, “소식이 끊기니 풀이 자라나기 전부터 서로 그리워하는 마음이 풀과 함께 자라납니다. 그러던 차에 문안 서찰을 받으니 책상을 마주 대하고 직접 목소리와 얼굴을 접한 듯합니다”라고 애틋한 우정을 표현하였다. 박상(朴祥)은, “한 마리의 개가 짖으면 백 마리의 개가 소리만 듣고 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지하여 권세에 빌붙어 아부하는 무리들이 이와 같이 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고 하여 당시 세태를 비판했다. 그리고 최산두는, “산꽃이 비록 늦었으나 향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또 수석(水石)이 그윽하고 기이한 곳은 초여름 철쭉꽃이 필 때가 가장 좋습니다”고 하며 유배지에서 친구를 만나 볼 수 있기를 소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저승에서는 교분(交分)을 다하리라”는 말을 전했다. 또 편지에서, “근래의 일은 더욱 비참하니 과연 누구를 원망하며 탓하겠습니까. 목숨을 부지하여 겨우 죽지 않고 있으나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처지를 매우 비관하였다. 그러면서 편지 말미에 “세상일은 절대로 다시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안처순을 염려했다. 이처럼 안처순이 받은 편지에는 당시 유배지에서 울분과 외로움을 토로한 기묘 사림의 생생한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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