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송주상(宋周相) 편, 『화양지(華陽誌)』
(30)송주상(宋周相) 편, 『화양지(華陽誌)』
  •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1.05.03 19:25
  • 호수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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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줄기는 만 번이나 꺾어지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

▲ 송시열의 초상화.
  조선 사람들은 송시열(1607~1689)을 ‘송자(宋子)’라 높여 불렀다. ‘자(子)’는 대학자, 큰 스승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를 붙인 경우는 퇴계를 ‘이자(李子)’라고 칭할 수 있다는 성호 이익의 언급 정도이다. 그러나 ‘이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없다. 조선 사람들은 송시열을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 반열에 둔 것이다. 송시열의 학문은 부친의 영향이 컸다. 부친 송갑조는 송시열에게 “주자는 훗날의 공자이고,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하며 주자와 이이의 학문을 따라 배울 것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주자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송시열은 주자가 살았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남송이 금(金)의 침략에 시달렸던 것처럼 청의 침략을 받은 조선은 당면 문제 역시 남송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이 지금 조선에도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언급하자 효종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까”라고 할 정도였다.


  과거에 합격한 후 송시열은 봉림대군(효종)의 사부로 임명되면서 효종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효종은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였는데, 그 중심 인물은 당연히 스승 송시열이었다. 그러나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송시열은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화양동에 머물며 제자들을 길렀다. 따라서 송시열에게 화양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화양지』는 1747년(영조 23)에 송주상(1695~1751)이 화양동과 송시열에 대한 각종 기록을 모아 엮은 것이다. 송시열의 후손인 송주상은 화양동을 방문하였다가 정철의 손자인 정호(鄭澔)가 지은 『존주록(尊周錄)』이 화양동과 송시열에 대한 사실을 개략적으로 기록하여 빠진 것이 많은 것을 알고 정본을 만들고자 『화양지』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에는 만동묘, 화양서원, 암서재 등 송시열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았다. 송주상은 그 유적의 현황과 화양구곡 등 주변의 자연 경관에 대한 여러 글을 모아 『화양지』를 엮었다. 송주상의 초고본은 백 년이 지난 1853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고, 1861년에 이를 수정 보완한 증수본이 나왔다. 우리 대학에는 증수본 『화양지』가 소장되어 있다.


  『화양지』는 총6편으로 되어 있다. 1·2편은 화양동의 연혁과 사적을 밝혀 놓았고, 3편에는 중국에 갔던 민정중이 명 의종의 친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얻어 오자 이를 송시열이 화양동 바위에 새긴 사실을 기록하였다. 4편은 만동묘(萬東廟)에 관련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만동묘의 이름은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 물줄기가 만 번 꺾어지고 꺾어지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듯 대세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듯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명이 조선을 도와 일본을 물리쳐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명에 대한 변치 않은 의리를 대변한다. 5편은 화양서원에 대한 기록이다.

  송시열을 모신 화양서원은 1695년에 화양동 아래에 세워진 만경대서원으로 시작되었다. 이듬해 숙종이 ‘화양서원’이라 사액하였고, 1710년에 만동묘 아래로 옮겼다. 이리하여 송시열을 제사하는 화양사원과 명의 황제를 모신 만동묘가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북벌로 상징되는 송시열과 조선을 도운 명 황제의 사당을 함께 두어 존명 의리를 강조하려는 의도였다. 6편 「총론대의」는 송시열의 ‘존명 양이’의 사상을 집약한 글을 싣고 있다. 송시열은 효종에게 올린 「기축봉사」에서 “정치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을 주장하였다.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송시열에게 청은 단지 오랑캐일뿐이었다. 송시열의 제자들은 그를 ‘송자’로 칭송했지만 그는 많은 사람과 불화를 겪었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 갈등을 빚었고, 그의 아들이자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도 결별하여 노론과 소론의 분열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그는 조선 당쟁에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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