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⑥ 백마강의 일엽편주
[신오도답파여행]⑥ 백마강의 일엽편주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5.03 19:28
  • 호수 1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당평백제국비명’의 정림사에서

⑥ 백마강의 일엽편주

 

  낙화암의 비극을 떠올려 보기 위해 고란사 선착장에서 백마강유람선을 탔다. 황포돛배를 흉내 낸 유람선은 ‘조룡대(釣龍臺)’ 옆에서 선회하여 구드래 나루터로 향했다. 2008년부터 운행을 시작했다는 황포돛배 유람선 확성기에서는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1977년)’이 흘러나온다. “영월대에 뜨는 달아 송월대에 지는 달아 / 그 옛날 낙화삼천 간 곳이 어디메냐”로 시작되는 읊조림이 백마강(부여군 흐르는 금강의 다른 이름)의 탄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한 번 가파른 형세의 낙화암을 쳐다보게 한다.


  삼월이지만 백마강의 물빛은 장마철처럼 황토색이다. 사대강 공사로 하천바닥의 골재를 캐내는 바람에 백마강은 푸른빛을 잃었다. 고란사 건너편의 흰 모래밭도 태반이 사라지면서, 청백의 조화는 사라져버렸다. 강바닥에서 퍼 올린 토사더미에 가려 유람선에서만 느낄 수 있던 ‘부산(浮山: 장마철 물이 넘치면 섬처럼 변해 산이 뜬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의 경관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고란사에서 수북정까지 운항하는 유람선을 탔지만 구정물로 변한 강물에 흥미를 잃어 중간에 있는 ‘구드래 나루터’에서 내렸다.


  지금은 유람선만 뜨고 닿는 곳으로 변했지만, 옛날 이곳은 백제의 주요 나루였다.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와 가까운 이곳에는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적지 않은 조각상들이 세워져 있지만, 어떤 기준으로 세웠는지 알 수 없다. 그 흔한 ‘모자상’부터 ‘농민해방 농업사수’를 각자한 비석까지 세워진 이곳에는 조각상이 나무처럼 숲을 이루고 있다. 조각공원은 특정 경향 혹은 주제를 기준으로 조각상을 선정하고 조성되어야 하는데 이곳의 조각상은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  


  백제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유적지를 가로 질러 옛 부소산성 매표소로 갔다. 1967년 왜색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옛 부여박물관이 보인다. 김수근이 설계한 이 건물의 외양은 지금 봐도 특이하다. 김수근은 이 논쟁을 겪으면서 전통적인 미의식을 더욱 심화시켰다고 한다. 경쟁관계였던 김중업의 비판을 통해 자신의 건축미학을 발전시켰던 그의 노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그에 비하여 백제의 유물을 부여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사용하는 부여군의 모습은 아쉬움이 없지 않다. 특히 1993년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한 ‘백제금동용봉봉래산향로(百濟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조형물을 부여군은 물론이고 이곳저곳에서 사용하다 보니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구드래 조각공원 표지석 상단부에도 이 향로의 꼭대기를 장식한 봉황을 앉혀 놓았는데, 백제인의 미의식을 재현한 상징이라기보다는 홰에 오른 수탉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부소산성 매표소 건너편의 작은 공방 작품들이 백제 유물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과거의 유물을 그대로 본뜨지 않고 현대적 감각으로 변용한 그들의 노력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배를 타고 구드래 나루터를 거쳐서 부소산성 입구로 돌아왔다. 이광수가 갔던 행로에서 적지 않게 벗어나 있었다. 고란사에서 낙화암을 올려봤던 이광수는 백마강가로 내려가지 않고 발길을 돌린다. 부소산에서 내려온 그는 ‘평제탑(平濟塔)’을 찾아 간다. 지금은 ‘정림사지오층석탑’으로 명명된 이 탑은 오랫동안 ‘평제탑’으로 불려졌다. 백제를 멸망시키고 ‘소정방’이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란 글자 때문에 제 이름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1942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 이곳이 ‘정림사(定林寺)’ 터이었음을 확인했지만, ‘정림사’가 백제 시대부터 불리어졌던 이름이었는지 아직도 규명되지 않았다.  


  이광수도 이 탑에 새겨진 명문(銘文) 때문에 ‘소정방’과 연결시키지만, 이 탑을 당나라인이 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당평백제탑(大唐平百濟塔)’이란 수치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如此한 萬古의 大傑作을 後世에 끼친 우리 祖先의 文化는 또한 자랑할 만하다”라면서 백제인의 우수한 조각 기술을 칭송한다. 그렇지만 소정방이 이미 있던 백제탑에 글자를 새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금마(金馬)에서 본 백제 시대의 또 다른 탑인 ‘미륵사지석탑’에 대한 서술과 달리 ‘정림사지오층석탑’에 대해서는 유래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정림사지오층석탑’과 관련된 그의 지식은 조선후기의 지리지 ‘여지도서(輿地圖書)’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석양을 비스듬히 받으며 서있는 탑을 감상하며 이 탑의 조형미를 예찬하고, 백제인의 숭고했던 정신세계를 흠모한다.

▲ 정림사지오층석탑.

  정림사지오층석탑을 처음 찾았을 때 받았던 감동이 떠올랐다. 육중한 돌로 만든 탑이 유려한 곡선의 미를 내재하고 있다는 점에 놀랐다. 수직의 탑신과 수평의 옥개석이 주는 긴장감은 살짝 치켜 올린 처마선을 따라가다 이완된다. 이층부터 탑신의 높이가 줄어들면서도 안정감을 해치지 않는 기하하적 구도의 완벽함이 경외감을 일으킨다. 오랜 세월을 겪으며 풍화된 화강암 재질의 탑에 저녁 햇살이 부드럽게 비치면 입체감은 더욱 도드라진다. 탑의 머리에 들기 시작한 아침 햇살은 기단을 향하여 내려갔고, 기단부터 거두어지는 저녁 햇살은 머리를 향하여 올라가며 마지막 빛을 발한다.  

▲ 궁남지.

  이처럼 아름다운 일몰은 ‘궁남지(宮南池)’에서도 볼 수 있다. 1990년부터 시작된 발굴 작업으로 이곳이 백제시대의 유적임은 입증되었지만, 삼국사기에 나오는 ‘궁남지’가 이곳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무왕 대에 백제인의 신선관(神仙觀)을 반영해서 조성했다는 ‘궁남지’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지금의 ‘궁남지’에서도 백제인의 미의식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일몰이 못가의 버드나무를 투영시키면서 연못은 거울이 되어 지상의 모든 것을 담기 시작한다. 붉은 대지가 붉은 물에서 들어오면서 하나의 형상은 둘로 분리된다. ‘궁남지’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광수는 이렇게 경이로운 경관을 보지 못했다. 문득 ‘회진(灰塵: 남김없이 소멸된 상황)된 사비(泗)의 서울을 보면서 애를 끓였던’ 그가 이곳의 일몰을 봤다면 어떤 감회를 토로했을지 궁금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