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씨앗나누기]6.해외연수 편
[여행씨앗나누기]6.해외연수 편
  • 길지혜(언론홍보·05졸) 동우
  • 승인 2011.05.03 19:38
  • 호수 1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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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여, 저 푸른 바다가 보이는가

6.해외연수 편

  “최좀순이 아니고, 점! 점이라고 써야지, 이 사람아.”
지난 24일 KBS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 <70년 만의 ‘가갸거겨’> 방송에서는 태어나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는 수양마을 할머니들을 소개했다. 고추 심고 밭 갈던 할머니들이 70년 만에 낫과 호미를 놓고 연필을 손에 쥔 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마을 회관에서 자기 이름을 꾹꾹 눌러쓰는 재미를 맛본 할머니들의 모습에 보는 나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찾아가는 여성농민 한글학교’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57세부터 78세까지의 할머니 학생 스무 명의 첫 학교다.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을 쓰게 된 76세의 오영례 할머니는 8년 전 남편을 여의고 문맹의 막막함을 뼛속깊이 느꼈단다. 이제 전화번호부를 찾아 전화를 걸 수 있고, 55년 전 발급 받은 주민등록증을 읽을 수 있게 됐다니 가슴속 응어리를 조금은 풀지 않았을까.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들을 박사로 키워낸 할머니도 한글학교 학생이다. 이 할머니는 박사자식을 두고 어릴 적 글자하나 못 가르친 게 미안하다고 말끝을 흐린다.

 
  까막눈 부모가 다시 한글공부를 하고, 자식공부를 시키는 것은 못 배운 것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간절한 바람과 못내 떨쳐지지 않는 미련이란 놈 때문이다. 미련은 평생의 멍에가 되어 잊을만하면 생각나고, 돌이키려면 때늦은 후회로 마음을 괴롭힌다. 그래서 죽을 때가 다됐다는 95세 노인도 연필을 잡는 이유가 평생 쌓인 미련을 떨치기 위해서 일거다.

 
  대학생이라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법한 해외경험 쌓기, 어학연수 혹은 해외 인턴쉽, 배낭여행 등 어떤 형태든 관계없이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겐 동경이요, 미련이다. 입사 지원서에 버젓이 자리 잡은 ‘해외경험 및 어학연수’ 항목을 보니 꼭 가야만 할 것 같고, 너나할 것 없이 어학연수를 떠나는 친구를 보면 마음이 조급한데 비싼 등록금 내기에도 생활이 벅찬 학생들은 평생 미련을 품고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많이 봤다.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편함, 내가 정해버린 나의 한계를 무너뜨리지 못한 채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 이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을 연상케 하는 ‘애늙은이 학생들’ 말이다.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유연성이 부족해 결국 자기 발전을 저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수양마을 할머니도 처음에는 겁이 났을 거다. ‘이 나이에 배워서 뭐해’라는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이들은 미련도 털어내고, 망설임도 뒤로한 채 실천하고 발전하고 있다. 한평생 농사만 짓던 노인네들이 연필을 잡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해외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 대학생들은 ‘미련’과 ‘주저’라는 단어를 말하기에는 너무 젊다. 우리는 언제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하고, 배울 수 있는 눈부신 젊음이 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항공기에서 내려다 본 서해바다. 첫 어학연수 때의 설렘을 담았다.

   1921년 여름 인도의 물리학자 라만(C.V.Raman)은 배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아마 그는 항해 중 많은 여유시간에 바다의 강렬한 색을 실컷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느 승객들과 달리 그는 파란 지중해를 보면서 마냥 쉬지만은 않았다. 고향 캘커타로 돌아온 그는 바다의 색을 연구해 새로운 지식을 향한 문을 열어젖혔다. 이후 1930년 그는 빛의 분자 산란(molecular scattering)에 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만약 해외로 나가는 것이 단순히 이력서의 빈칸을 채우기 위함이거나, ‘기본’은 해야지, 혹은 ‘남들도 하니까’ 의 출발선 상에 있다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할 것을 권한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끊임없이 어떤 것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최고의 이력을 남길 수 있는 사례도 많다. 다시 말해 해외경험을 하는 것 자체만이 발전의 표상이요, 나아가야할 길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것을 대하는 ‘열린 자세’와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있다. 물리학자 라만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파란 지중해를 본 것에 그치지 않고, ‘바다색’을 연구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도 수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몇 해 전, 호주로 해외연수를 다녀온 필자도 유경험자로 다양한 질문을 받는다. 해외연수 국가를 정하는 것부터, 비자발급, 홈스테이생활, 영어어학원 선택, 짐 싸기 등 기본적인 물음과 진로의 문제 등 갖가지다. 그런데 당시 필자 역시 대서양의 짙푸른 바다색에만 눈이 멀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바다를 보고나니, 용기가 생기고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는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해외연수를 고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는 당당히 자신의 경계를 허물기를 당부하고, 돌아왔을 때엔 왼쪽 가슴 한편에 자신만의 바다색 연구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청춘’의 귀함을 다시 느끼게 한 수양마을 할머니의 바다색은 받아쓰기 100점이었다.


미스트레블(Misstravel.co.kr)
길지혜(언론홍보·05졸) 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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