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④ 목로주점 18년, 6남매 키워낸 김용순씨
행복을 찾아서 ④ 목로주점 18년, 6남매 키워낸 김용순씨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1.05.13 00:10
  • 호수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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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시장 끝자락에 목로주점 ‘송파집’

지친 걸음 쉬어가는 서민들의 간이역
삼십촉 백열등이 그네를 타던’ 그곳에
6남매 키운 김용순씨의 18년이 어룽져있다

 


석촌시장은 8호선 송파역과 석촌역 사이에 있다. 송파구사거리에서 ‘엄마손쇼핑센터’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상가와 아파트단지 사이 좁은 골목 안에서 야채·생선·과일·잡화 등을 파는 점포들이 어깨동무 하듯이 이어져있다. 그래서 실은 골목시장, 혹은 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인심 좋기로 소문난 떡볶이집 ‘가운데집’의 옆은 아파트단지 정문이다. 떡볶이집 셋이 사이좋게 붙어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다. ‘가운데집’이 아직 가운뎃집이었던 1984년부터 90년대 초까지는 이곳도 1일 내방고객 10,000여명, 종사자 수 500여명에 달하는 중형 종합시장으로서 꽤 북적였다. 시장을 찾는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한 건 90년대 중반,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인터넷쇼핑이 발달하면서부터다. 그러던 2005년 2월 시장 뒤편에 고급 고층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아파트 운영위원회는 몇몇 점포를 사들여 가게를 밀고 그 뒤로 대리석 벽면에 LED네온사인이 번뜩이는 아파트 정문을 세웠다. 오른쪽 떡볶이집도 그중 하나였다. 곧 시장 상인들은 상인조직을 결성했다. 분주히 여성고객쉼터와 화장실을 설치했다. 지금도 시장 곳곳엔 ‘서울전통시장 상품권 가맹점’ ‘SSM보다 17.5% 저렴!’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시장의 왼편 끝자락엔 광주집, 보성집, 호남집… 8개 목로주점(木路酒店,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펴놓고 술을 파는 집)이 이어져있다. 18년 전 문을 연 ‘송파집’ 김용순(77)씨는 여기서 주점을 하며 6남매를 다 키웠다. 어버이날을 사흘 앞둔 지난 5일, 송파집을 찾았다. 김씨는 “‘동해야’ 봐야 되는데….” 하면서도 슬쩍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동해야’ 할 때 와서 죄송하다.
괜찮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한테 무슨 기사거리가 나올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여기서 자리 잡게 됐나.
광주 금당(지금의 송정)이 고향인데, 쌀 한 말에 봄내 일해 주는 게 지긋지긋했다. 먹고 살길을 찾아 스물넷에 남편과 큰딸, 큰아들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나.
봉천동에 살던 올케의 당숙모 집에 얹혀살았다. 

▲‘올케의 당숙모’라니… 눈치 보였겠다.
그랬다. 잠깐 얹혀살다가 당시 변전소 옆 1만5천원짜리 월세방에 들어갔다. 고생도 많이 했다. 남편은 남한산성에 나무를 베러 나갔다. 그걸 지게로 송파장터까지 짊어지고 와 팔아서 연명했다. 잠실이 아직 넓은 강이었던 시절이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송파가 죄다 호박밭, 배추밭이었다. 나는 남의 논 남의 밭 메는 품팔이도 참 많이 했었다.

 


▲저축은 좀 할 수 있던가.
저축은 무슨 놈의 저축. 처음엔 2남매 데리고 상경했는데, 서울 와서 4남매를 더 낳았다. 그저 입에 풀칠하기에도 빠듯했다.

▲6남매를 어떻게 다 먹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바깥양반이 강서중학교(지금의 일신여자중학교)에 소사로 취직됐다. 학교에서 가축을 길러주고 삯을 받았다. 그래도 6남매 먹이기엔 한참 모자라는 월급이었다. 나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복숭아 장사를 했다. 당시엔 방이동이 온통 복숭아 과수원이었다. 석촌, 송파 일대에서 팔았는데, 한 광주리 떼와 이틀이면 다 팔아치웠으니 되려 소사일보다 벌이가 더 나았다.

▲또 어떤 일을 했나.
품팔이나 광주리행상은 일부일 뿐이다.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안 해본 일이 없다. 그러다 큰 무당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무당집이라 돈이나 쌀은 못 받아도 떡과 밥은 실컷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 떡으로 굶는 것을 면했다. 집에 냉장고도 없어서 겨울엔 장독에 묻어 뒀다가 돌 같은 떡을 꺼내먹었다. 공사판에서 노가다(막일)도 오래 했다.

▲젊은 여자를 써주던가.
그 사람들은 ‘걸음걸이와 눈빛’을 쓰윽 보고서 사람을 뽑았다. 나는 원체 날래고 부지런해서 일을 잘했다. 논밭이던 송파가 갑자기 엄청나게 개발되면서 일손이 많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공사판에서 벽돌을 지고 날랐다. 기술자들 나갈 때 따라 나가 허드렛일도 거들었다. 지금도 근방에서 오래된 아파트들, 남부순환도로, 예술의 전당 등 내가 공사를 거둔 건물을 많이 본다. 그런데 마흔다섯 즈음 되니까 힘이 부쳐서 못하겠더라.

▲월세방에서 오래 살았나.
물불 안 가리고 일하며 3천원짜리 곗돈을 부운지 3년 만에, 비록 쪽방이지만 처음 내 집을 가졌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라에서 송파일대를 개발한다며, 집을 철거하겠다고 했다. 일찍 나간 주변 집들은 보상금으로 30만원씩을 받았다. 우리는 더 버텨서 50만원을 받아냈다. 박정희 대통령 때다. 새마을운동이다 뭐다 떠들썩하던 그때였다.

박 대통령이 다리 밑에서 살던 부랑자들 살라고 가락동에 ‘평화촌’을 만들었다. 거기 6평짜리 단칸방에 66만원 주고 들어가 8식구가 부대끼며 살았다. 거기서 큰딸도 여웠다(결혼시켰다). 지금의 문정동 로데오거리 쪽 금호아파트 단지다. 그렇게 고생하기를 수십 년, 84년도에 마침내 평화촌이 아파트로 재개발되면서 집다운 집에서 살게 됐다. 큰아들은 여기서 여웠다. 남원 색시였다. 전라도 사람이라 안 시키려다가…. (웃음)



▲장사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고생하는 걸 보다 못한 조카딸이 “이모, 그러지 말고 장사를 해”하더라. 그때 여기 석촌시장이 막 생기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폐물이고 뭐고 있는 것 다 팔아서 1천50만원을 마련했다. 그걸 밑천으로 84년 아니면 85년에 시장 안쪽에서 조카딸하고 같이 야채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조카딸한테 가게를 맞기고 행상을 다녔더니, 글쎄 우리 자리를 다른 사람이 슬금슬금 반 정도 꿰찬 것이 아닌가. 그때는 먼저 돗자리 펴는 사람이 장땡이던 시절이었다. 그 양반이 술을 좋아하는 걸 알고 막걸리를 사 먹이며 살살 달랬다. 그러니까 30만원에 자리를 내놓더라. 조카딸은 야채장사를 계속 하고, 내가 그 자리에서 건어물과 생선을 팔았다.



▲목로주점은 언제부터.
송파일대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급속도로 개발됐다. 그러다보니 자리를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졌다. 장사 시작하고 3년 지났을 때 농 삼아 “천만원 주면 팔겠다”고 했더니 사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천만원에서 20만원 깎은 980만원에 팔았다. 3년 만에 땅값이 50배가 오른 셈이었다. 그 돈 중의 일부로 지금 장사하고 있는 이곳 송파집 자리를 샀다. 원래 절반 크기였는데, 옆 자리까지 각각 백만원씩, 2백만원에 사서 합친 것이다. 원래는 건어물, 잡화를 팔았는데 장사가 영 안 되더라.

▲그동안 자녀들이 다 컸겠다.
첫째가 딸(57), 둘째는 아들(54), 셋째부터 다섯째까지는 쭈욱 딸(51·49·47), 막내가 아들(43)이다. 억척스럽게 벌어 6남매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막내는 전문대학까지 갔다. 막내 빼곤 다 여웠다. 먹고 살기 바빠 애들이 어떻게 컸는지도 나는 모른다. 큰딸이 알아서 다 키운 것 같다. 큰딸은 일신여상 졸업 후 아남산업에 취직했다. 벌써 손주가 9명이나 된다.

▲건강은 어떤가.
관절 탓에 다리를 저는 것 빼면 여태 병 모르고 살았다. 나도 영감님도 건강하다. 18살에 당시 24살이던 영감님과 결혼해 60년째 살고 있다. 지금껏 투닥투닥은 했어도 잘 살아오고 있다. 당시 영감님은 술 배달하는 일을 했었는데, 사진 한 장도 못보고 ‘그냥’ 결혼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안 살았을 거다. ‘나 아니면 누가 살겠나?’ 하고 살았다. (웃음)

▲공부에 대한 미련은 없나.
미련 없다.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
워낙 배우지를 못한 탓에 꿈도 없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너무 고생만하고 사셨다. 후회하진 않나?
미련도 후회도 없다. 지금 나와 자식들, 손주들이 밥 잘 먹고 고생 안하니 그걸로 족하다.

▲지금은 행복한가.
행복? 나는 그런 것 잘 모르겠다. 자식들 손주들이나 건강히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제 좀 여유롭게 살면서 해보고 싶은 일은 없나?
장사가 재밌다. 쭉 장사나 하련다. (웃음)


 

지친 사람들은 어머니를 찾아온다
송파집엔 유독 젊은 손님들이 많았다. 목로주점에선 드문 일이다. 김씨에게 물으니 “맞다. 젊은 단골손님들이 ‘찾아온다’”며 “내가 노인네들 와서 떠드는 걸 안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웃어보였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꼭 김씨의 가족처럼 보였다. 도무지 손님과 주인의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손님들은 김씨를 어머니나 누이, 친구로서 대했다.

이곳에서 남동생과 동생친구, 그리고 올 10월에 결혼할 예정이라는 동생의 여자친구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던 김치훈(33)씨. 이들은 서울발레시어터 발레단의 발레리노·발레리나다. 이곳을 너무 좋아해 마음에 든 사람은 다 데려오는 탓에 자신과 친한 사람들은 전부 이집에 와봤다고 한다. 단대신문이라는 얘기를 듣자 "승우(조승우)"도 데려왔었다고 반색을 한다. 오늘도 화성문화회관에서 공연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씨는 대학 때부터 벌써 13년째 단골이다. 김씨가 김용순씨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워보였다.

“어머니는 항상 실컷 먹어도 얼마냐고 물어보면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부르신다. 언제나 양도 잔뜩 주면서. 한번은 변사또 생일상 마냥 잔뜩 먹었는데,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부르셔서 죄송한 마음에 내가 생각한 알맞은 돈을 휴지 밑에 끼워놓고 도망 나오기도 했다. 다른 손님들 많을 때는 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를까봐 일부러 외상하고 나올 정도다.”  

“어머니 정이 너무 좋다. 내 어머니 같이 좋다. 3년 전 돌아가신 친어머니 생각이 나면 이곳에 온다. 천하의 맛집이라 할지라도 이곳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행복하려고 여기 온다. 여기 오면 행복해진다.”

 김상천 기자 firestarter@dankook.ac.kr 
사진: 이승제 기자 redhan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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