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우사덕·우홍택의 『상현록(尙賢錄)』
(31)우사덕·우홍택의 『상현록(尙賢錄)』
  •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1.05.18 21:03
  • 호수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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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김홍도가 그린 사인암.

  명종 22년(1567), 조선에 온 중국 사신 허국과 위시량은 “조선에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아는 자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들은 조선의 학문 수준이 궁금하여 이렇게 물어 본 것이었다. 이때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이들을 맞이한 이황은 고려의 우탁·정몽주, 조선의 김굉필·조광조·서경덕 등이 성리(性理) 학설을 깊이 연구하고 체득하였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기대승(1527~1572) 역시 우탁과 정몽주 이후에 비로소 성리학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당대를 대표하는 두 학자는 조선의 성리학이 우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우탁(1263~1342)은 경사(經史)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뛰어났다고 한다. 송의 성리학자 정이(程     )가 주석한 『주역』이 고려에 전해졌으나 이를 능히 해득하는 자가 없었는데 우탁이 전심으로 연구하고 체득하여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고려사』 편찬자는, “이리하여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높이 평가하였지만 정작 우탁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이에 우탁의 후손인 우사덕과 우홍택이 우탁에 관련된 글들을 모아 『상현록』이라 하였다.


 『상현록』 첫 머리에는 1778년에 이상정이 쓴 서문이 있고, 권1에는 우탁의 영호루 시 1수, 『고려사』·『동국통감』 등의 역사서에 나오는 우탁과 관련된 기록들, 이곡·김종직 등이 우탁을 기리며 지은 시 9편 등을 수록하였다. 권2에는 우탁을 배향한 역동서원, 단암서원, 구계서원 등에 관한 문헌과 제문, 우탁의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 등이 실려 있다. 그리고 『속록』에는 단양 우씨의 계보와 우탁의 시, 제문, 묘지명, 그리고 우탁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이 있다. 권말에는 1871년(고종 8)에 김대진이 지은 발문이 있다. 이상정은 서문에서, “강직한 성품을 타고나 곧은 도와 굳은 절개로 세상에 빛났다. 은둔하여서는 학문을 닦아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고, 더욱이 『주역』에 조예가 깊어 정밀하게 본체를 밝혀주었다. 비록 문헌이 없어 그 높은 사상을 만분의 일도 고증할 수 없으나 동방의 성리학이 실로 선생에게서 비롯되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곡은 우탁에 대한 시에서 “젊어선 의기 드높아 공경을 추하게 보았고 만년에는 성대한 명성을 숨기신 분”이라고 하였다.

  그는 말년에 경상도 예안현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 권1의 영호루 시는 안동에 있는 영호루를 읊은 것으로 “영남 땅에 노닌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호산(湖山) 경치를 가장 사랑하노라”고 하였다. 이처럼 우탁은 말년에 안동에 은거해 후학을 가르쳤다. 우탁에 대한 칭송과 숭배는 서원 건립으로 이어졌다. 우탁의 학문을 지극히 흠모하였던 이황은 역동서원의 건립에 앞장섰다. 안향을 모신 백운동서원에 이어 조선에서 두 번째로 건립된 것이 역동서원이었다. 역동서원이 완성된 후 이황은 “제수를 갖추고 제사에 참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사신의 행차가 있어 가지 못하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라고 하며 공무로 참가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 했다. 그런데 이황은 우탁과 인연이 깊었다. 이황은 명종 3년(1548)에 단양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 사인암(舍人巖)을 유람하였다. 사인 벼슬을 지낸 우탁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 단양에 내려와 이곳을 자주 찾았고, 이에 후대 사람들이 그를 추모하여 사인암이라 이름 하였다. 역동서원의 건립 이후 우탁의 고향인 단양에 단암서원이, 우탁이 처음으로 관직 생활을 했던 영해에 단산서원이, 그리고 말년에 은거했던 안동에 구계사원이 세워져 그를 추모하였다. 『상현록』은 이들 서원의 건립 사실을 자세히 수록하였다.


  우탁은 ‘탄로가(歎老歌)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탁은,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라고 늙어감을 한탄했다. 그러나 우탁은 80세로 생을 마감했으니 예나 지금이나 장수했다고 할 수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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