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⑧ 조선의 미곡은 군산으로
[신오도답파여행]⑧ 조선의 미곡은 군산으로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5.18 21:06
  • 호수 1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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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세파에 찌든 공간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군산(群山)’으로 가는 길은 지루했다. 서부간선도로부터 막힌 도로는 서평택 나들목을 지날 때까지도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연무(煙霧)까지 잔뜩 낀 도로에서 정체되어 있던 차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듯싶다가도 금방 속도가 떨어졌다. 이럭저럭 행담도 휴게소에 차를 세웠을 때에는 목과 어깨는 물론 발목까지 뻐근했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안개는 대지에 짙게 깔려 있었다. 서해대교를 넘어 ‘당진(唐津)’으로 들어서면서부터 내달릴 수 있었다. ‘서해안고속도로’는 이름과 달리 바다를 별로 볼 수 없는 도로였다. 서해대교에서 서해를 처음 만난 ‘대천(大川)’을 지날 때야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아주 잠깐 나왔다 사라진 탓에 ‘서천(舒川)’을 지날 때 봤던 갯벌이 바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속도를 올렸다. 이런, 가려던 경로에서 벗어났다. 금강 하구둑을 통해 ‘군산’으로 가려면 서천 나들목에서 나갔어야 했는데 지나쳐 버렸다. ‘동서천 나들목’에서 빠져서 가는 길은 많이 도는 길이었다. 금강 하구의 주요 도시인 ‘장항(長項)’과 ‘군산’을 함께 둘러보려던 계획을 바꿨다.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장항’과 ‘군산’ 지역을 통틀어 군장산업지대라 부른다. 두 도시는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금강을 매개로 연계된 생활권이었다. 그렇지만 물살이 빠른 금강을 건너는 일이 쉽지 않았던 만큼 두 지역은 별개로 존재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하구둑 위로 도로가 만들어지고 철도까지 부설되면서 두 지역의 결속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지금은 ‘군산’ 중심으로 생활권이 재편되고 있는 중이다. ‘군산’이 개항되고 ‘장항’에 제련소와 항구가 생기기 이전까지 금강 하구에서 번화한 곳은 ‘웅포, 나포’ 등의 나루였다. 그러나 이들 나루들은 근대 도시 ‘군산’과 ‘장항’이 발전하면서 퇴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금강의 흐름을 막아버린 둑까지 생기면서 바닷물은 갑문에 막혀 금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강경’까지 올라왔다는 바닷물은 더 이상 둑과 갑문에 막혀 둑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이미 교통로의 기능을 상실한 금강이었지만, 바다와 강물이 만나면서 만들어낸 생태계는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둑이 금강을 가로 막으면서 강은 생명력을 잃고 있는 중이다. 어찌 보면 금강 하구둑은 ‘농지 확보’라는 미명 하에 진행되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 토목사업들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미 강물을 막고 갯벌을 메워 얄팍한 이익을 챙기려던 우리의 욕망이 초래한 결과는 시화호가 보여 주었다. 이제라도 멈춰야 하지만, 오히려 현실은 반대편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 차는 금강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폭이 넓어진 강물이 서해에 가까이 왔음을 알려준다. 이광수는 ‘강경’에서 호남선 열차를 타고 ‘이리(裡里: 지금의 益山)’를 거쳐 ‘군산’에 왔다. 그가 내렸던 ‘군산역’은 장항선과 연결된 지점으로 역이 이전하면서 ‘군산화물역’으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실어온 엄청난 양의 쌀은 이곳에서 하역되었다가 군산항(지금의 군산 내항)으로 옮겨진 후 일본으로 가는 배에 선적되었다. ‘군산역’과 ‘군산항’은 일본으로 반출되는 조선 쌀의 최대 집산지였다. 해방과 함께 쌀의 반출이 중지되면서 군산항의 규모는 축소되었고, 더불어 군산역의 중요성도 떨어졌다. 자동차 전용도로가 동서남북으로 개통되면서 군산역은 더욱 쓸모가 없어졌다. 그나마 역사는 구시가에서 서해안 고속도로 군산 나들목으로 가는 직통도로를 개설하기 위해 2010년 철거되었다. 사라진 역사 뒤편의 가림막을 들추고 승강장으로 갔다. 동서로 넓게 펼쳐진 역 터에 이미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었던 이곳은 표지석만 남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이광수는 밤늦게 ‘군산’에 도착해서 다음날 시내를 대충 둘러 본 다음 ‘전주(全州)’로 떠났다. 그는 일본인들로 북적이는 이 도시의 인상에 대하여 간단하게 기술했다. 의례적으로 했던 관청 방문도 생략한 채 그는 반나절을 산보 삼아 이 도시를 둘러본다. 그는 『매일신보』가 요구했던 식민도시의 발전상을 한 문장으로 기술했다. 그의 관심은 문맹퇴치를 위한 조선인 유지들의 교육 운동이었다. 그렇지만 군산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서술하지 않았다. 문명화를 위한 노동자의 교육조차도 군산의 상공업자와 선주 등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했던 그는 당시 군산 지역의 노동 상황을 간과하고 있었다. 식민지배의 여건상 기사 내용의 제한을 받기도 하겠지만, 사회개조를 사회 상층부의 지도력에 의존했던 그의 평소 소신은 여기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 ‘군산’의 실상은 이십년 뒤 채만식에 의해 훌륭하게 묘사되었다. 채만식은 『탁류』에서 ‘금강의 맑은 물이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과 생선 비린내에 탁해지고, 강경을 지나면 서해의 밀물까지 만나 더욱 흐려진다’고 쓰고 있다. 장사꾼 냄새 물씬 풍기는 ‘강경’을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탁류』에서 개항장이었던 ‘군산(群山)’도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강경’부터 탁해진 금강은 ‘군산’에 이르러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쏟아 버린다’고 적고 있다. 그에게 ‘군산’은 이미 혼탁해진 세파에 찌든 공간이었다. 


  ‘옥구(沃溝)’가 고향이었던 그는 이 작품에서 개항 도시 ‘군산’에서 벌어지는 추악함을 고발하고 있다. 젊은 합백꾼(合百꾼: 하바꾼-보증금이 없어 거래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쌀값 혹은 주식의 오르내림에 내기를 거는 도박꾼)에 멱살을 잡혔던 ‘정주사’가 수치심에 비틀거리며 걷던 군산항 일대는 일본인의 거리였다. 이광수가 “가구의 정연함과 가옥의 정제함이 꽤 미관이다”고 표현한 군산 시가를 채만식은 ‘하이카라 거리’라고 썼다. 이광수가 희구했던 교육을 받았다 하더라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탁류』의 ‘초봉이’도 교육받은 노동자였지만, 그녀의 삶은 문명인의 형상과 거리가 멀었다. ‘군산’에서 조선인들이 자리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쌀 수출로 먹고 사는 ‘군산’에서 하층민을 벗어날 수 없었다. 간혹 극소수의 인물이 미두취인소(미곡시장)에서 돈을 벌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일본 자본의 거간꾼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바다를 통해 호남 곡창지대의 쌀들은 일본으로 실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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