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기자석 - 살아있으면 좋은 일이 참 많다
주간기자석 - 살아있으면 좋은 일이 참 많다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1.05.24 21:12
  • 호수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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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밤 11시 45분, 친구 전화다. 의식이 돌아오기까지 울리는 전화기를 손에 쥐고 잠시 앉아있어야 했다. 전화를 받았다. “그거 너 다 가져… 그….” 비몽사몽인 건 난데 도리어 친구가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몇 년간 애지중지 키우던 동물을 나더러 가지라는 둥, 웅얼웅얼, 알아듣기 힘든 말들을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이 인간이 술 취했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10년 넘게 친구한 인간치고 너무 낯설었다. 친구의 웅얼웅얼이 너무 무감각해서 등골이 오싹했다.

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친구 집으로 갔다. 택시 안에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친구는 받지 않았다. 막상 친구집에 도착해 벨을 누르려니까, 오밤중에 찾아온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때 문밖으로 친구 아버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놈아, 화장실 들어간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나오냐.” 설마하는 마음에 계단 난간에 올라가 그 집 화장실 창문으로 들여다보니, 세상에, 친구는 칼로 그은 손목을 욕조에 담근 채로 기절해 있었다. 하얀 욕조가 친구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곧바로 전화기를 꺼내 119에 친구 집 주소를 알려주며, 동시에 벨을 눌렀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었는데, 그런 침착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저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살리고 보자’는 생각은 했었다.

문을 연 친구 아버지에게 “화장실에서 친구가 손목을 그었다”고 말했다. 친구 아버지도 뭔가 낌새가 이상했던 차였던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뛰어가 화장실문을 부쉈다. 도끼였었나 장도리였었나, 아무튼 부쉈다. 큰 길로 나가서 구급차를 골목으로 불러와 친구를 실었다. 업혀 나오는 친구도, 외아들을 업은 친구 아버지도 얼굴이 백짓장이었다.

병원에서 친구는 날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이 피를 많이 흘리면 정신도 온전치 않게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빠져나간 만큼의 피를 수혈받는 동안 친구는 푹 잤다. 나는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참 후에 다시 살아난 친구의 첫 마디는 “담배 좀”이었다.

친구는 다시 살아난 뒤로 변했다. 제법, 늦은 나이에 전문대학에 가더니 제법, 총학생회장도 했다. 친구는 졸업 후 건방지게 대기업 딱 한군데에만 원서를 넣더니, 더 건방지게 철썩 붙어버렸다. 지금은 제법, 건방지게, 연하의 여자 친구와 만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편집회의 때 박윤조 기자가 "자살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다"는 말을 한 다음날 새벽에, 그 친구가 전화로 자살 얘기를 꺼냈다. 친구는 지금, 갑자기 자살한 친구의 상갓집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그래서 옛날 생각이 났다고, 그래서 전화했다고 띄엄띄엄 말했다. “소주 한 잔 하자”는 친구의 마지막 말에, ‘이 인간을 살리길 잘 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으면 좋은 일이 참 많다.

김상천 기자  firestarter@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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