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⑨식산흥업의 몽상
[신오도답파여행]⑨식산흥업의 몽상
  • 김재관(동양학 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5.25 08:46
  • 호수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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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로 가던 이광수 농촌의 실상 못 보다

 

  ‘군산(群山)’과 ‘전주(全州)’를 잇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21번 국도로 갈까 하다, 최초의 포장도로로 건설된 26번 국도로 들어섰다. ‘전군가도(全群街道)’로 불려졌던 26번 국도는 호남 일대의 쌀을 실어가기 위해 일제가 건설한 최초의 포장도로이다. 왕복 4차로로 확장되었지만 군데군데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좌우로 들어오는 평야를 보니 이곳이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차량통행이 많은 길답게 몇몇 곳에 육교가 설치되어 있었다. 적지 않은 교통사고가 있어 육교를 설치했나 보다. 어르신에게 무단횡단을 하지 말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투의 게시판 문구가 위압적이지 않고 재미있다.


  험준한 노령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 평원은 전주, 익산, 김제, 군산 일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이곳에서는 오래전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한반도 최대의 벼농사지역이었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이곳에서 생산된 쌀은 조선인보다 일본인을 살찌게 하는 유용한 양식이었다. 일제가 이 지역에서 수탈한 쌀은 이 도로를 통하여 일본으로 실려 갔다. 최초의 포장도로였던 이 길은 수탈과 착취의 표상(表象)이었다. 가난한 조선인 소작농들은 벚꽃나무 가로수가 유명했던 이 길에 꽃이 만개해도 즐겁지 않았다. 식민지의 외형은 그럴 듯하게 포장되고 선전되었지만, 보리고개를 걱정해야 하는 조선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특히 한일병합 이전부터 이곳 만경강 일대의 농토를 사들였던 일본인 지주들의 착취는 심했다. 조선인 지주들 또한 수탈의 구조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7할이 넘는 소작료와 수리조합비 등의 각종 경비를 떠안아야 했고, 이에 저항하는 조선 농민들의 소작쟁의 또한 빈번하게 발생했다.    


  ‘군산’을 떠나 ‘전주’로 향하던 이광수는 이곳 농촌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는 기차로 ‘군산’을 떠나 ‘이리역(익산역)’에서 내려 ‘전주’로 가는 기차로 갈아탄다. 기차 안에서 7월 초순의 만경강 일대 평야를 바라보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차창 넘어 보이는 이곳의 실체를 그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기차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었다. 경철(輕鐵)을 타고 전주로 가는 동안, 그는 경철의 속도와 실내 장식에 감탄하는 말만 적었다. 기차로 이동할 때 차창 밖의 대상을 원경으로만 묘사했던 그는 전주의 풍경도 ‘전주의 산하는 수려하다’라고만 적는다.


  ‘전주’는 전라북도의 평야와 산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한 곳이다. ‘호남제일문’ 아래를 지나 전주 시내로 갔다. ‘호남제일문’의 현판은 전주를 대표하는 서예가였던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이 썼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선비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강암 선생의 성품답게 ‘湖南第一門’이라고 쓴 그의 글씨는 유려하면서도 강직한 느낌을 준다. ‘김제(金堤)’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활동했다. 다섯 가지 서체(篆書, 隸書, 楷書, 行書, 草書)에 통달했던 그는 ‘강암서체’로 자신의 서체를 집대성했다. 선생은 1995년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서화(書畵)를 전주시에 기증하였다. 전주시는 ‘강암’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생이 부지를 제공해서 건립한 ‘강암서예관’에 이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십여 년 전 이곳에서 봤던 ‘전서’가 다시 보고 싶었지만 이광수가 갔던 여정을 추적하기 위해 ‘전주객사(全州客舍)’로 향했다.

▲전주 객사.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경기전(慶基殿)’ 근처에 주차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군산’을 거쳐 이곳까지 오느라 끼니를 대충 때웠더니 배가 고팠다. 조선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 주변에는 전주를 대표하는 맛집들이 많았다. 이광수가 전주 유지들의 환대를 받은 곳도 이쯤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면서생(一面書生)에 불과한 자신을 대우해준 이들에 대하여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는 『오도답파여행』을 연재하기 위해 다섯 개 도의 도지사를 방문했는데, 유일하게 전북 도지사만이 조선인이었다. 이광수를 도청 집무실은 물론 관사에서 영접을 했던 전북 도지사의 의도는 알 수 없다. 『매일신보』의 배후에 있는 조선총독부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같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전주의 유지들은 그가 도착했던 전주역에서부터 영접을 시작하여 그가 전주를 떠나는 날까지 극진하게 대접을 했다. 이러한 광경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고, 이광수도 이에 대한 답례로 ‘전주’ 관련 기사를 나흘 동안 연재했다.     

 
  일제에 의해 풍남문(豊南門)을 제외한 성곽이 해체되면서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었던 ‘전주’의 위상은 전라북도의 행정 중심지로 국한되었다. 일제는 전주에 있던 조선시대 유적을 해체하거나 용도를 전환해서 조선왕조의 전통을 부정하고자 했다.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해체는 물론, 전주 감영을 철거하고 전북도청 건물을 신축했다. 조선시대 출장 관리를 위한 숙소였던 객사는 ‘전북물산진열관(全北物産陳列館)’으로 용도를 바꾸어서 공간적 상징성을 약화시켰다. 

▲전주감영을 철거하고 세운 구 전북도청.

  이광수는 일제의 이러한 해체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전주’를 찾았다. 일제는 전주의 가로를 정비하면서 이름 또한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이광수는 일제의 의도는 간과한 채 ‘大正町通’으로 이름을 바꾼 ‘객사 거리’를 문명화의 지표로 파악했다. 근대문명의 예찬자였던 그가 외형을 통해 근대의 표상을 인식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원초적 자연에 대한 호의적 평가와도 연계되어 있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 그는 ‘전주천’ 인근의 ‘銀杏屋’라는 여관에서 묵었다. 이 여관은 오늘날의 ‘다가교(多佳橋)’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전주천’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었나 보다. 이광수는 여관의 건너편의 언덕을 ‘綠陰이 如滴하는 小岡’이 있고, 잠결에도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예찬했다. 조선의 역사를 철저하게 부정했지만, 조선 이전의 과거와 자연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어찌 보면 가까운 과거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식의 다른 표현이 근대 찬양과 자연 예찬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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