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주세붕의 『죽계지(竹溪志)』
(33)주세붕의 『죽계지(竹溪志)』
  •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1.05.25 09:02
  • 호수 1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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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가르침이 없다면 인류는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구 달성군에 있는 도동서원의 수월루.

 『중종실록』에 의하면 주세붕(1459~1554)은 학문이 해박하며 후덕하고 인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풍기군수로 있을 때에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리자 이를 잘 구휼하였는데, 그의 고향집 곡식까지 운반해 백성을 돌보니 모두가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또한 풍기군수로서 백성을 교화한 내용을 소개하였다. 즉, “형이 아우와 재판하여 재물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었는데, 주세붕이 그로 하여금 아우를 업고 온종일 마당을 돌게 하였다. 몹시 지치게 되었을 때에 그를 불러 묻기를 ‘너는 아우가 어려서 업어 기를 때에도 다투어 빼앗을 생각을 가졌었느냐?’고 하니, 그가 크게 깨닫고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세붕을 헐뜯던 사람들도 그의 선정(善政)을 보고 모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주세붕은 풍기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는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42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은 고려의 유학자 안향(1243~1306)이 살았던 순흥에 사당을 세우고 그를 추모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양반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몇 년 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백운동서원에 대해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였는데, “(학문을)이어서 다시 닦게 한다(紹而修之)”는 뜻으로 소수서원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의 사원은 처음으로 국가의 공인을 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주세붕이 이에 관한 사실을 정리하여 『죽계지』라 하였다. 처음에 『죽계지』는 6권 3책으로 편찬되었는데, 1824년에 안향의 20대손인 안병렬이 3권 1책으로 줄여 간행하였다. 우리 대학에는 1863년(철종 14)에 금속활자본으로 중간한 것을 소장하고 있다.


  『죽계지』는 서문, 본문,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안향의 전기인 「행록」, 송의 성리학자를 기록한 「존현록」, 그리고 「학전록(學田錄)」 등을 기록하였다. 『죽계지』의 맨 앞에 있는 서문에서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창건할 당시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을 밝히고 있다. “내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 큰 가뭄이 들었고 그 이듬해는  흉년이 들었는데 그해에 백운동에 회헌(안향) 선생의 사당을 짓고 그 이듬해에 따로 서원을 세웠다. 이에 대해 혹자는 백성이 굶주리고 있으니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하여 당시의 부정적인 시선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주세붕은 “하늘이 사람을 내리심에 인간이 되게끔 가르쳐야 한다. 사람에게 가르침이 없다면 인류는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고 하며 비록 곤궁할 때라도 교육을 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백운동서원은 순흥의 영구봉 아래에 있는 죽계(竹溪)를 끼고 있다.

 

「죽계별곡」에 “천 년 동안 한결같고 산수가 맑다”고 할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세붕은 “이곳은 산이나 언덕, 강물에나 골짜기나 항상 하얀 구름이 가득함으로 백운동(白雲洞)이라 이름하였다”고 그 내력을 말하였다. 주세붕은 죽계가 흐르는 바위에 ‘경(敬)’자를 새겼다. ‘경’은 성리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로 하라는 수양론의 핵심이었다. 주세붕은 “사당과 서원은 비록 오래 보존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천 년 후에도 ‘경’자를 새긴 돌이라 칭해준다면 족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주세붕은 원활한 교육을 위해 학전(學田)을 두었다. 『죽계지』에 따르면 학전은, “공부하려는 자들이 집안이 넉넉하면 밥을 싸가지고 와서 배우면 좋겠지만 만일 가난에 시달린다면 비록 학문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형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아 슬프다! 밥을 싸서 올만한 자는 공부하지 않고, 공부할만한 자는 뜻은 있어도 밥이 없으니, 우리의 학문은 어찌 될 것인가. 이것이 진실로 서원에 밭을 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학전은 서원의 기숙생이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도록 생활을 보조하는 일종의 장학제도였다. 서원에 학전을 둔 주세붕의 마음을 지금의 교육 당국자들이 깊이 새겨들을 일이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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