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金時敏)의 『조야휘언(朝野彙言)』
김시민(金時敏)의 『조야휘언(朝野彙言)』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1.05.31 17:53
  • 호수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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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가장 장엄한 것은 경회루 돌기둥에 새겨진 용이다
▲ 현대의 경회루 모습. 지금과 달리 원래의 경회루 기둥은 용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여러 책들을 인용하여 내용을 알아보기 쉽도록 항목별로 분류하여 엮은 책을 ‘유서(類書)’라 한다. 따라서 ‘유서’는 현재의 백과사전과 비슷한 책이다. ‘유서’로 유명한 것으로는 『태평어람』, 『옥해』, 『연감유함』 등이 손꼽힌다. 특히 『태평어람』은 55개 부문에, 인용한 책이 1,690종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유서’로는 『고사촬요』, 『지봉유설』, 『성호사설』 등이 특히 유명하다. 조선시대의 유서 중에서 우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는 김시민(1681~1747)의 『조야휘언』 필사본과 필사자 미상의 『국조휘언초』 등이 있다. 

『조야휘언』은 분류 항목을 ‘문(門)’이라 하였는데,  모두 9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도문(君道門)』은 항목의 이름처럼 군주의 올바른 도리에 대한 내용인데 군주 외에 후비, 후궁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다. 왕비와 후궁들에 관련해 일어났던 정치적 사건들을 보여주고 있어 왕실의 화목과 안녕을 염원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군도문』외의 항목을 보면 『신도문(臣道門)』은 훈신(勳臣)과 충신에 관한 기록이며, 『이부문(吏部門)』에는 경연관, 간쟁의 항목을 두어 경연과 언관의 역할을 강조하였고, 『호부문(戶部門)』은 화폐, 시장, 진휼 등의 경제 사정을 서술했다. 그리고 『예부문(禮部門)』에는 왕실의 혼인, 서원, 과거 등을, 『병부문(兵部門)』에는 무과(武科)와 군사 제도 등을, 『형부문(刑部門)』에는 법률과 형벌 등의 법제에 대해 서술했다. 따라서 『조야휘언』은 조선시대의 왕실, 사회, 경제, 풍속, 사상 등을 아는데 큰 도움을 준다.

『조야휘언』은 『국조보감』, 『용비어천가』와 같은 관찬서, 그리고 『용재총화』, 『아성잡기』, 『필원잡기』 등의 야사류 서적을 참고했는데, 정사와 야사는 물론 문집 등 당대에 대표적인 저작 110종을 인용하였다. 주요 내용을 보면 『아성잡기』을 인용하여 “태조대왕은 대업을 이루실 때 항상 태종과 일을 도모하였고, 공정(정종)은 참여하지 않아 나라를 세운 공이 없었다. 공정이 상왕으로 별궁에 계실 때 태종은 항상 자신을 신하라 칭하고 우애를 극진히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즉위한 태종을 비호하고 조선 왕실의 정통이 태조, 태종으로 이어졌음을 밝혀두려 하였다.

그리고 “태종이 신하인 이명덕에게 귤 한 그릇을 하사하면서 ‘그대의 노모에게 가져다 주라. 내가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한 『국조보감』의 내용을 소개하여 태종의 효심이 깊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세종이 태평관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잔치하는데 효령대군(세종의 형)이 술을 권하자 일어나 받았다. 이를 보고 사신이 말하길 ‘임금이 형을 우대하는 것이 이와 같구나’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였다.

이렇듯 『조야휘언』에는 왕실의 화목과 안녕을 염원하였던 듯 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성종이 왕비 윤씨를 폐한 후에 세자인 연산군이 거리에 나가 놀기를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하루 종일 놀고 온 연산군에게 ‘오늘 거리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성종이 묻자 ‘특별한 것은 본 것이 없고 다만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라 가는데 소리 내며 다정히 가는 모습이 부러웠다’고 대답하니 성종이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종 때에 온 유구국(지금의 오끼나와) 사신이 귀국길에 말하기를, ‘조선에 와서 본 세 가지 장관은 첫째가 경회루 돌기둥에 새겨진 용의 장엄함이요, 둘째는 재상의 긴 수염이 눈처럼 희고 풍취가 있는 것이고, 영의정 정창손이 사신을 접대함에 술잔이 쉬지 않는 것이 세 번째다’라고 하였다”는 『필원잡기』의 내용을 소개하였다. 이렇듯 『조야휘언』은 조선의 왕실, 정치, 인물 등에 관한 야사를 전해주고 있다. 『조야휘언』은 보완되고 필사되는 과정에서 『국조휘언』, 『동포휘언』, 『대동휘찬』 등의 다른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어 조선의 대표적인 ‘유서’로 널리 읽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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