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 ⑩ 식산흥업의 몽상(2)
[신오도답파여행] ⑩ 식산흥업의 몽상(2)
  • 김재관 연구교수
  • 승인 2011.05.31 18:06
  • 호수 1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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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흥업의 논리 식민화 논리와 동일
▲전통의 현대화 공간 전주한옥마을의 처마.
▲ 경기전과 전동성당.

‘전주’를 찾은 이광수는 충남도청을 방문했을 때처럼 도지사로부터 전라북도의 도정 현황과 계획을 듣는다. 전라북도는 조선 최대의 쌀 생산 지역답게 농업 생산량 증대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농지 정리, 수리 조합의 활성화, 종자의 선택과 경작방법의 개량 등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키고, 농업 구조 개편으로 토지를 잃은 소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방안으로 부업을 장려하고, 저금리 금융기관을 통해 생활자금을 지원하겠다는 농업활성화 방안은 내용만 놓고 보면 그럴 듯했다. 오늘날의 농업 정책과 유사한 면이 많은 일제의 농업 정책은 실행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해방 이후에도 재현되었던 식민지 농업 정책은 우리들의 삶에 스며든 식민 요소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반성하게 한다.

일제는 수리조합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일제의 지원을 받은 전북 지역의 지주들은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넓은 농경지 사이로 모세혈관처럼 수로를 만들었다. 수경재배로 농사를 짓는 벼농사의 특성상 수로가 만들어지면서 벼 재배의 면적도 확대되었다. 또한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으면서 기후의 영향도 적게 받게 되었다. 이처럼 수리조합의 설립은 쌀 수확량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광수가 전주를 찾았을 당시 전북 지역에는 네 개의 수리조합이 설립되어 있었다.

수리조합을 ‘文明的 新事業, 新施設’로만 파악했던 이광수의 인식은 수리조합의 수탈적 성격을 간과하고 있었다. 당시 대다수의 소작농들은 지주에게 수확의 7할 이상을 임대료로 지불하는 것은 물론 수리조합을 통해 공급받은 물의 사용료, 비료 값 등의 부대  비용도 부담하고 있었다. 각종 비용이 소작농에게 전가되면서 소작쟁의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들이 지주에게 요구한 사항 중에 수리조합비에 대한 내용이 적지 않았던 것을 보면 수리조합을 둘러싼 문제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이광수는 수리조합의 경영 주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조선인도 문명화의 대열에 동참했다고만 강조한다. 

이외에도 오늘날의 농협 등의 정책과도 연관되어 있는 ‘농자기관(農資機關)’의 설립, 소농을 위한 ‘전주농사조합(田主農事組合)’ 설립 등을 추진하는 전북의 농업정책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서술한다. 농업 정책 중심인 전북의 산업 정책 내용은 대부분 조선시대 산업을 근대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특히 ‘전주’의 한지 산업을 기계공업으로 대체하는 시도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전주에 대규모 제지공장이 들어선 것은 1965년이지만, 일제는 조선초기부터 종이를 만들던 ‘전주’에 기계화된 제지공장을 설립하였다. 이광수가 ‘전주’를 찾았을 당시에는 시험 가동 중이었는데 성과는 미미했다. 이미 풍부한 물을 바탕으로 ‘남원’과 ‘전주’ 등에서 수확한 닥나무 원료로 만들어졌던 ‘전주’의 ‘한지’는 조선초기부터 왕에게 진상할 정도로 최상품의 품질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대량으로 생산하고자 했던 종이는 우리의 한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한지는 대량으로 생산할 수 없는 종이였다. 저렴한 종이가 등장하면서 천년 이상을 간다는 한지는 대량생산된 산성지들에 의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근대 이후 대부분의 출간물들은 산성지로 만들어졌다. 저렴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산성지’는 지식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수명이 짧았다. 1990년대 이후 ‘중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성지 일색의 종이 수요도 바뀌고 있는 중이다. 근대 이후 저렴한 원가와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던 산성지는 보존성과 종이에 대한 인식 변화와 함께 대중으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셈이다.   

‘전주’가 한국 현대제지산업의 중심지가 된 시기는 1965년 ‘새한제지’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조선시대부터 종이를 생산했던 지역답게 전주시는 전통 한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다각화하고 있다. 그렇지만 근대 이후 사람들은 저렴한 종이만 찾았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생산해야 하는 한지는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았다. 한지 대중화의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임권택 감독은 <달빛 길어올리기>라는 영화를 통하여 ‘전주’에서 생산하는 한지 장인들의 삶을 조명하고자 했다. 전통 한지의 맥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칭찬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시류에 편승한 장인들을 비난할 수만도 없다. 근대 이후 전주의 종이 장인들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우리 종이가 겪었던 굴곡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일제가 전북 일대에서 추진했던 공업정책 등을 호의적으로 봤다. ‘전주공립간이공업학교’를 세운 일제의 의도는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았던 식민지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제는 고등보통학교보다는 기능 교육 학교 설립에 중점을 두었다. 이광수는 하급 기능인만을 육성하고자 했던 일제의 교육을 문명화의 신사업으로 파악했다. 그의 의식은 식산흥업만이 문명 조선을 이루는 길이라고 봤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무정』에서 근대적 표상에서 나오는 소리를 문명의 소리로 인식하고, 문명사회는 이런 소리들이 많아야 한다고 묘사했던 그였다. 그는 식산흥업의 과정에서서 소외되는 전통 장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회진화론을 신봉했던 그에게 산업 발전과 이를 이루기 위한 직업 교육은 조선의 문명화를 위한 첩경으로만 인식되었다. ‘전주’와 ‘순천(順天)’을 잇는 경편철도(輕便鐵道)의 부설만을 희망하고, 용기 있는 대기업가의 배출을 ‘대한(大旱)의 운예(雲霓)같이 바라’는 그가 지향하는 지점은 산업부국이었다. 철도의 개통이 초래할 지역 산업의 붕괴, 대량생산이 초래할 소규모 산업의 붕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날도 우리들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식산흥업’의 명제는 대한제국부터 등장해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산업화 시기에도 다양하게 변주되었던 발전논리였다. 근대문명을 전범으로 삼는 순간부터 우리의 의식은 이 주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광수는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에서 오늘날의 우리보다 강박감을 느끼며 이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준비론’에 입각해 펼쳤던 식산흥업의 논리가 조선 지배를 강고하게 했던 일제의 식민화논리와 동일선상에 있었음을 그는 간과하고 있었다.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김재관 연구교수
김재관 연구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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