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 ② 이성복의 「序詩」와 저녁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 ② 이성복의 「序詩」와 저녁
  • 김주언(교양학부)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09.07 00:29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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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그리움의 분량만큼 술 한 잔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이성복, 「序詩」중에서

 

이성복의 「서시」에는 두 개의 저녁이 등장한다. 저녁을 먹으면 꼼짝없이 저녁이 될 터이다. 혹은 저녁이란 놈이 온다. 그러면 저녁을 먹지 말아 볼까. 저녁을 먹지 않아도 물론 저녁은 온다.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것이 아니라 저녁을 먹어도 저녁은 오고 저녁을 먹지 않아도 저녁은 온다. 저녁을 먹지 않는다면 밥도 먹지 않은 놈이 시커먼 발로 쳐들어올 뿐이다. 저녁이라도 먹어야 우리는 캄캄한 저녁이란 놈과 맞설 수 있다.

시인은 그러나 기름지고 거한 정찬의 저녁을 먹은 것 같지는 않다. 간이식당의 저녁에는 번지르한 기름기의 드레싱 같은 것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결핍이 있다. 아마도 시인은 허름한 식당에서 혼자 한끼를 사먹는 것으로 저녁을 적당히 해결한 것으로 보인다. 저녁을 혼자 먹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 부질없는 상상을 접고 시를 다시 본다면, 그는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알아볼 때까지”는 정처 없는 사람이다. 즉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에 목마른 자인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쓰는 말에 ‘개와 늑대의 시간(heure entre chien et loup)’이란 말이 있다. 집에서 기르던 친숙한 개가 낯선 늑대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는 이와 반대로 낯선 늑대가 친숙한 개처럼 보일 수도 있는 저물 무렵 박명의 시간대를 일컫는 말이다. 저녁은 물론 ‘개와 늑대의 시간’을 지나서 오는데,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자신이 식별되는 사랑은 시인에게 ‘개’인가 ‘늑대’인가. 사랑이 아직도 낯선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이 사랑을 시인의 저 그리움으로 데려가고 싶다. 시인은 노래했었다:“죽고 싶어도 짓궂은 배가 고프고/ 끌려다니며 잠드는 그림자, 이맘때 먼 먼 저 별에 술 한잔 따르고 싶더라 내 그리움으로”(「구화」)라고. 우리는 결국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의 분량만큼만 저 저녁의 간이식당에서 술 한 잔을 따를 수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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