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⑫ 영락한 백제의 유적과 전북의 새로운 중심지 ‘裡里’
[신오도답파여행]⑫ 영락한 백제의 유적과 전북의 새로운 중심지 ‘裡里’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9.20 14:26
  • 호수 13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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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의 고언 “대지주들은 보리심을 갖고 소작인 구제사업 참여해야”


호남선과 군산선, 전라선이 교차하는 도시 ‘익산(益山)’의 지명 변천은 곡창지대의 중심에 위치했던 만큼 변화무쌍했다. 마한 시대 ‘금마저(金馬渚)’로 불렸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는 ‘금마군(金馬郡)’, 고려시대에는 ‘익주(益州)’, 조선시대부터 ‘익산(益山)’으로 불리어졌다. 현재의 ‘익산’은 ‘금마’에 있던 익산군청이 1911년 호남선 철도의 교차지인 ‘이리(裡里)’로 옮기면서 도시가 된 곳이다. 


일제는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호남선 철도를 전북의 중심도시였던 ‘전주’를 비껴가는 축으로 부설했다. 갈대가 무성한 습지였던 ‘이리’는 세 노선의 철도가 교차하면서 전북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이미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부터 이곳의 지리적 이점을 간파한 일본인들은 ‘이리’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자신들만의 거주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리’의 조선인은 ‘군산’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을 위한 기생적인 존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가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도 일본인 가옥이 오백호, 조선인 가옥이 삼백호일 정도로 ‘이리’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이 많은 도시였다. 식민화된 도시인 ‘이리’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인사언어범절(人事言語凡節)’ 등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 옷(衣服)만 입고 있으면 조선인인 줄도 모르겠다’는 이광수의 말처럼 일본식을 추종했다. 그는 ‘이리’가 쌀 경제를 기반으로 전북 유일의 넉넉하고 풍성한 도회로 성장하더라도, 조선인과 일본인이 나란히 발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병적 발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선의 전통적인 도시도 일본 자본에 잠식당하면서 조선인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군산’이나 ‘이리’처럼 일본인들이 건설한 도시에서 조선인의 존재감은 전무했다. 더군다나 조선인 대지주들은 일본인 지주들의 약탈 방식을 따라하며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인 대지주처럼 조선 자작농의 토지를 고리대금으로 탈취하거나, 소작인에게 각종 수수료 등을 떠안기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조선인의 발전을 기원하는 그의 의도와 달리 조선인 대지주들은 일본인 대지주들의 체계적인 수탈 방식을 따라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이익을 얻을 대지주들이 한번 보리심(菩提心, 불도의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으로써 널리 중생을 교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소작인 구제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광수의 고언은 공허했다.  


오히려 쌀밥만 먹는 풍습을 개량하여 빚을 줄이고, 여자도 논농사에 종사해서 이익을 증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 또한 ‘춘포’의 ‘호소가와 농장’을 모범사례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식민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일본인 대지주들은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하여 이 지역의 황무지를 지속적으로 개간했고, 하천에 제방을 쌓고 간척지를 조성했다.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지가 늘어났지만 노동력은 부족했다. 여성을 소작인으로 고용한 ‘호소가와 농장’의 조치도 만경강 유역에 조성한 간척지를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광수의 농업발전론은 일본인 대지주의 농업경영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춘포’의 ‘대장촌’과 ‘이리’를 둘러보면서 지주와 소작인 관계에서 비롯된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농업 현실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그는 식민지 농업의 문제를 조선왕조의 폭정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하며 언급을 회피한다. 『매일신보』의 특파원이라는 신분이 그의 언술에 제약을 가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이리’에서 느꼈던 그의 절망감은 ‘금마’ 일대의 백제 유적지에서 송가(頌歌)로 반전된다. 삼한시대부터 주요 곡창지대였던 이곳은 ‘마한(馬韓)’을 비롯하여 이곳을 지배했던 역대 왕조의 중요한 정치·경제적 기반이었다. 백제의 중흥을 노렸던 ‘무왕(武王)’이 이곳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한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이광수는 조선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보여주는 유적을 돌아보며 영욕의 감정을 토로한다. 이미 ‘부여’에서 애절한 감정으로 토로했던 그의 백제에 대한 애모(哀慕)는 이곳에서도 이어졌다.    


‘전주’부터 찾았던 이광수와 달리 ‘군산’을 출발하여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지 석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낮은 구릉 사이로 난 길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이광수는 미륵사지로 가는 길이 송림 사이로 나있었다고 했는데, 구릉의 턱밑까지 개간한 밭들 때문에 송림은 거의 사라졌다. ‘산’에 남아있는 소나무 군락만이 이곳이 소나무 숲이었음을 알려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경쾌하게 자전거를 타고 갔던 이광수와 달리 편도로만 달려야 하는 길은 따분한 느낌마저 들게 했다.


미륵사지로 가는 720번과 722번 지방도로 주변에는 붉은 황토가 지천이다. 막 고구마 순을 심은 황토밭은 기울어지는 저녁햇살을 받아 더욱 붉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높은 산이 없어 햇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이곳에서 자라는 고구마는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밭이랑 위에 심어진 고구마 순을 따라 가면 소나무가 서 있는 ‘산’과 만난다. 이곳 사람들은 땅에서 살짝 솟구친 낮은 언덕도 ‘산(山)’이라 부른다. 산세(山勢) 있는 산만을 산으로 알았던 내 눈에는 경사진 밭처럼 보이는데, 소나무와 묘만 경작지는 아니다. 사람들은 집에서 가까운 ‘산’에 묘를 썼다. 이곳은 죽은 자의 쉼터이자, 고된 농사일의 와중에 잠깐 숨을 들이는 산 자들의 쉼터이기도 하다. 산 자들은 죽은 자를 자신들의 삶의 공간에 묻음으로써 삶과 죽음을 공유한다.


이윽고 미륵산이 나타났다. 금남정맥(錦南正脈)의 주요 산줄기에서 벗어난 산임에도 외형이 범상치 않다. 산등성이를 완만하게 뻗어 내려 미륵사지를 감싸고 있는 미륵산의 형세는 서울의 ‘북악(北岳)’과 닮았다. 미륵산을 등지고 광활한 평원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미륵사지의 규모만 보더라도 백제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이 절의 상징적 중요성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재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서탑(西塔)은 복원을 위해 가림막으로 가려 놓아 전모를 볼 수 없다. 1992년 새로 세운 동탑(東塔)이 서탑의 원형을 따랐다고 하지만 조악하기 그지  없다.


2009년 1월 일제가 복원을 빙자하며 시멘트로 쳐발랐던 이 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이 ‘무왕’과 ‘선화공주’가 아니었음을 밝혀주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을 역사적 사실과 달리 이들의 사랑이 깃든 곳으로 기억한다. 마치 영락한 백제의 운명처럼…….

▲미륵산과 복원중인 미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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