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⑪ 선량한 제국주의자
[신오도답파여행]⑪ 선량한 제국주의자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9.20 14:30
  • 호수 13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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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 대안 ‘조선농장’의 소작제

‘전주’와 ‘익산’을 잇는 국도 27호선을 타고 ‘춘포역(春浦驛)’으로 간다. 일제강점기 ‘대장역(大場驛)’으로 불리어졌던 역사(驛舍)는 폐역이 되면서 창문과 출입구가 막혀버렸다. 현존하는 철도역사(鐵道驛舍) 중 가장 오래된 역사라고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210호)으로 지정해놓고 껍데기만 보게 하는 것은 야만적인 처사이다. 문화재로 지정했다면 그 가치를 알 수 있게 개방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철도사에서 간이역의 기능과 의미를 알 수 있게 역사 내부를 일부라도 공개했으면 좋겠다. 비록 폐역이 되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활용할 수 있는 시설로 만들면 문화재 보호와 활용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옛날 역 마당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것처럼 이곳을 주민들의 공동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 일종의 지역 문화관 혹은 역사관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이미 철도역의 기능을 상실한 춘포역에는 교행 대기 중인 열차만 가끔씩 선다. 이마저도 공사 중인 전라선 복선 철도가 개통되면 철로도 없이 역사만 덩그렁 서있게 될 것이다. 사람이 만든 건물에 사람의 흔적도 공존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역 앞으로 뻗은 길로 간다. 


춘포역 앞에서 만경강의 둑까지 직선으로 이어진 길의 좌우에는 면사무소와 우체국 등 ‘춘포면’의 주요 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 ‘호소가와(細川)’의 ‘조선농장(朝鮮農場)’이 이곳에 조성되면서 만들어진 도로들은 아직도 춘포면의 중심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대장촌(大場村)’으로 불려진 이곳에는 구마모토(熊本)의 대귀족이었던 ‘호소가와’의 ‘조선농장’이 있었다. 지금의 익산시 춘포면 춘포리와 덕실리가 ‘대장촌’으로 불려지게 계기도 1904년부터 이곳에 조성되기 시작한 ‘조선농장’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이리(裡里)’로 돌아가면서 지금은 폐역이 된 이곳에 내렸다. 행정 중심지도, 산업 도시도 아니고 문화 유적의 흔적도 없는 ‘대장촌’에 들린 이유는 ‘조선농장’의 경영을 선전하기 위한 매일신보사의 기획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농업 경영의 모범으로 추켜세울 정도로 ‘조선농장’의 경영 방식은 이익만을 추구했던 일본인 소유의 다른 농장과 차이가 많았다. 비료 요금과 수세 등을 포함하지 않고 소작료로만 수확의 45%를 받았던 다른 지주들에 비하여 ‘조선농장’은 40% 내외의 소작료를 받았다. 또한 식량이 부족한 춘궁기에 좁쌀을 소작인에게 나눠주고 추수 후에 무이자로 돌려받았을 정도로 소작인들에 대한 처우도 좋았다. 당시 조선의 지주들은 추수를 담보로 묵은 쌀을 춘궁기에 대여하고 5할의 이자를 붙여 추수 후에 햅쌀로 돌려받고 있었다. 안정적인 ‘지주-소작인’ 관계를 구축하여 품질 좋은 쌀을 생산하려고 했던 ‘조선농장’의 이러한 경영방식은 조선총독부의 관심을 끌었다. 조선총독부는 지주와 소작인들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고 있는 ‘조선농장’을 이들 간의 바람직한 관계를 제시할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고, ‘오도답파여행’의 지면을 통해 알리고자 했다.


매일신보사의 의도로 이곳을 시찰하게 된 이광수는 이곳을 조선농업의 발전 모델로 생각한다. 그는 조선농장에서 이루어진 농기구의 개량, 새로운 종자의 육종과 보급, 수확물에 대한 품평회와 보상 체계 등에 대하여 극찬한다. 이에 비해 기술 개량의 노력도 없이 소작인을 수탈하여 부를 축적하는 조선인 지주들은 흉악무정(凶惡無情)한 자들로 비판한다. 그는 ‘조선농장’의 경영 방식이 확대되어 조선인 지주들의 흉악한 행태에 일침을 놓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조선농촌의 수탈 구조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조선농장’은 일본인과 조선인 지주들에 의해 수탈당하는 조선 농촌에서 보기 드문 곳이었다. 이곳은 안정적인 소작체계를 정착시켜 쌀의 수확을 증대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을 모범적으로 실현하는 곳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농장’처럼 세련된 경영을 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1920년대 이후 더욱 빈번하게 일어났던 소작쟁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에서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봉건(反封建)적 의식과 가난한 조선인들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그의 생각을 틀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는 절대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던 조선 농민들의 생존권을 걱정했고, ‘조선농장’처럼 선량하게 운영되는 소작제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식민지 이전부터 100정보(삼십만평, 991735.537㎡) 이상의 농지를 소유한 대지주가 많았던 조선의 곡창지대 전북에서 소작농의 처지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었다. 자작농들의 토지가 지주들에게 넘어 가면서 자작농은 소작농이 되었고, 원래 소작농이었던 이들도 계속 소작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광수는 ‘농업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기관을 세워 저금리로 농민들에게 융자해주자’고 했지만, 이 혜택은 지주들만 누릴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인 지주들은 식산은행에서 저금리로 융자받은 돈을 조선인 자작농에게 고금리로 빌려주었고, 빚을 갚지 못하면 땅을 빼앗는 방법으로 부를 축적했다. 비록 ‘조선농장’이 다른 지주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선량한 경영을 했다고 하지만 농장의 규모를 늘려 가는 방식이 달랐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지주들처럼 폭압적 경영이 아닌 합리적으로 경영을 했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만경강의 작은 포구였던 ‘봄나루(春浦)’는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광활했다.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 ‘봄나루’로 불리어졌던 것 같은데 수심이 깊지 않은 이곳에 배가 뜰 수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제는 1920년 만경강 일대에서 발생한 홍수피해를 줄이기 위해 둑을 쌓고 간척지를 조성했다. 간척지가 없다면 지금도 서해의 밀물이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간척지 때문에 수심은 얕아졌지만 만경강은 여전히 이곳의 젖줄 역할을 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이곳 사람들은 만경강의 물을 끌어 올려 땅에 논을 풀었고 벼농사를 지어 왔다. 그러나 벼농사의 비중이 떨어지면서 이곳에서도 논보다는 다른 곡물과 채소를 재배하는 밭이 늘고 있다. 우리 농업이 처한 상황은 곡창지대인 이곳도 비껴가지 못하나 보다.  


▲현존하는 철도 역사 중 가장 오래된 춘포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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