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⑫ 조선반도의 낙원을 꿈꾸는 도시
[신오도답파여행]⑫ 조선반도의 낙원을 꿈꾸는 도시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9.27 17:58
  • 호수 1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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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는 기차를 타고 평야지대인 김제와 정읍을 지나 노령과 조우했다

 

철도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조선의 주요 운송수단은 강과 바다를 오가는 배였다. 여객과 화물은 구분되지 않은 채 물길과 바닷길을 통해 오갔다. 그렇지만 철도가 개통되면서 사람들의 동선은 철도역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송정리역(松汀里驛)’이 전남 지역의 주요 역으로 등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호남선은 ‘천안(天安)’과 ‘목포(木浦)’를 이으려던 기존 설계안을 바꿔 ‘대전(大田)’에서 ‘목포’를 잇는 축으로 부설되었고, 조선의 전통 도시였던 ‘광주(光州)’와 ‘전주(全州)’를 비껴갔다. 일제가 호남선 철도를 전남도청이 있던 ‘광주’를 배제하고 서쪽에 있는 ‘송정리’로 지나가도록 부설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호남선의 공사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하는 설은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조선의 오래된 도시였던 ‘전주’와 ‘광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라는 설은 앞의 이유에 비하여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이리(裡里)’가 철도의 교차지로 부각되면서 일본인의 도시로 발전한 것에 비하여 ‘송정리’의 발전은 ‘이리’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보름 정도 걸렸던 시간은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하루로 단축되었다. 호남선이 부설되기 이전에도 연안항로에 화륜선이 등장하면서 이틀에서 사흘 정도로 여행 시간이 줄기는 했다. 1874년과 1894년 과거를 보러 두 차례 한양에 갔던 구례 출신 지식인 ‘류제양(柳濟陽)’은 일기에서 첫 번째 여행이 12일, 군산에서 화륜선을 탔던 두 번째 여행이 3일 걸렸다고 적고 있다. 그의 손자인 ‘류형업’은 1917년 이리에서 호남선 기차를 타고 한나절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차바퀴가 화살구름과 같이 날아, 물과 산이 어느 쪽에 있는지 알 수 없고, 아침 밝은 때에 출발하여 앉아서 천리를 왔다’고 서울에 도착한 감회를 적었다. 


이렇게 하루도 안 걸려 서울을 오갈 수 있게 되면서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지형적 장애물을 직선으로 뚫고 지나가는 철도로 인하여 사람들은 편안하게 목적지로 갈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땀을 흘리며 넘어야 했던 ‘노령(蘆嶺)’은 차창 밖의 경관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광수가 ‘노령’을 넘으면서 ‘뾰족뾰족 상공을 뚫을 듯이 서있는 봉우리와 산(峯巒), 녹음이 우거진 사이로 보이는 초가집이 서 있는’ 풍경에서 ‘새소리, 벌레 소리가 푸른 물과 함께 어우러지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기차 안에 있기 때문이다. 차창이라는 프레임을 통하여 포착된 ‘화중지경(畵中之景)’은 근대 교통수단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이광수는 기차를 타고 평야 지대인 ‘김제(金堤)’와 ‘정읍(井邑)’을 지나 전남의 관문 ‘노령’과 조우했다. 그는 ‘노령’ 인근의 ‘백양사(白羊寺)’를 찾지 못하는 상황을 아쉬워했다. 이미 절의 명성을 들었지만 『매일신보』가 기획한 일정에 쫓기다 보니 ‘백양사’는 물론 ‘장성(長城)’도 들릴 수 없었다. 매일신보사는 그의 여행을 통해 조선의 전통문화보다 식민지의 통치 성과를 보여주고자 했고, 여정 또한 도청소재지와 일본인이 건설한 신흥도시 위주로 구성했다. 이러한 의도로 기획된 여행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경유지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처럼 이광수의 여행은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따라 이루어졌다. ‘이리역’을 출발하여 ‘송정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차창 밖 풍경으로만 전북과 전남의 자연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감탄해 마지않던 ‘노령’ 인근 ‘내장산’과 ‘백암산’ 일대는 오늘날도 최고의 경승지이다. 내장산은 가을의 단풍이 유명한 곳이다. 잎의 두께가 얇고 작으면서 가장자리에 솜털이 난 내장산 단풍나무 잎은 역광을 받을 때 찬란하게 빛나는데, 내장사로 가는 길에는 이들이 지천이다. 내장산의 명물 오색 ‘단풍굴(丹楓窟)’은 주지였던 다천 스님이 평생을 바친 역작이다. 이광수가 ‘정읍’을 지나던 때만 해도 내장사에서 지금과 같은 단풍 풍경을 구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곳의 대표 사찰은 ‘백양사’였다. 비슷한 시기에 창건되었으나 풍진을 겪으면서 ‘백양사’는 고찰(古刹)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도 ‘백양사’는 고아(高雅)한 느낌을 준다. ‘내장사’가 형형색색 연등처럼 밝게 빛나는 곳이라면, ‘백양사’는 담백색 초롱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곳이다. ‘백양사’로 오르다 보면 이곳에 오지 못해 아쉬워했던 이광수의 안타까움을 체감으로 느낄 수 있다.


‘정읍’에서부터 나란히 달리던 호남선 철도와 호남고속도로는 장성 나들목에서 갈라진다. ‘황룡강(黃龍江, 장성 일대를 흐르는 영산강의 다른 이름)’과 만나는가 싶더니 철도는 ‘황룡강’ 물줄기를 따라 ‘목포’를 향해 내달리고, 고속도로는 ‘못재’를 넘어 ‘광주’로 향한다. 산줄기가 바다까지 뻗은 지형 때문에 전북에 비하여 소출이 적어서였을까? 이광수가 ‘광주’를 찾았을 때 이곳 사람들은 ‘전주’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지 않았다. ‘전주에 비겨서 어떠오’라는 물음에 그는 ‘미래에도 전주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지만, 오늘날의 상황만 놓고 보면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는 농업적 측면에서만 ‘광주’의 현재와 미래를 평가했다. 또한 이곳의 조선인이 문명화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도 기후가 온화해서 내륙과 바다에서 풍부한 산물을 얻을 수 있는 전남이 조선반도의 낙원이 될 것이라 상상했다. 그의 희망처럼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던 ‘전주’는 물론 인근에의 ‘나주(羅州)’에 비해서도 규모가 작았던 ‘광주’는 오늘날 호남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전라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광주’는 광역시가 되면서 전라남도와 행정적으로 분리되었다. 그렇지만 ‘광주’는 여전히 전라남도의 중추도시이다.


또한 광주는 한국민주주의 발전사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다. 도청이 ‘무안(務安)’으로 이전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옛 전남도청 별관은 철거 여부를 두고 여전히 갈등 중이다. 1930년 준공한 본관에 비하여 건축사적 가치는 없을지 모르지만, 한국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역사적 사실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기념관으로 보존했으면 좋겠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잊지 않게 하는 ‘아우슈비츠’처럼….

 

▲한국민주주의 발전사의 상징적 장소인 옛 전남도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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