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망각
[백색볼펜]망각
  • 권예은 기자
  • 승인 2011.10.04 14:11
  • 호수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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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는 것도 필요한 법

 

◇ “아, 맞다! 또 깜빡했네.” 요즘 밖에 나왔다가 다시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가지고 나와야할 물건을 바보같이 까먹어서다. 주요 대상은 대개 핸드폰이나 지갑, 오늘 제출해야할 과제 같은 것들. 조그만 핸드폰은 어디에 발이 달린 것인지, 손에 들고 다니다보면 어디다 두고 나오기 일쑤다. 아직까지 잃어버리지 않은 게 그저 용할 뿐이다. 내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겨난 것처럼 자꾸 자꾸 깜빡하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술을 그만 마셔야 할까.’ ‘뇌 활성화 체조를 좀 해볼까.’ 점점 둔해져가는 머리를 탓해보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꾸 건망증이 심해진다던 엄마의 말씀이 이리도 와 닿을 줄 몰랐다.


◇ 20세기 초 독일의 심리학자 에빙하우스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수업 시간에 암기한 것을 20분이 지나면 42%나 망각한다고 한다. 1시간이 지나면 55%, 하루가 지나면 67%, 이틀이 지나면 69%, 15일이 지나면 75%, 한 달쯤 지나면 90%를 잊게 된다고 주장했다. 에빙하우스의 연구 결과를 보면 생각보다 하루가 지난 이후 망각하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다. 반면 새로운 지식이 입력된 뒤 결국 24시간 이내에 가장 많이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날 하루 동안만 잘 기억해 놓으면 대부분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잘 안되는 게 현실이다. 예습, 복습 철저히 하면 시험 잘 볼 수 있는 것을 알지만 결국에는 늘 벼락치기를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 인간은 태생적으로 망각의 동물이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고 머리가 슈퍼컴퓨터처럼 돌아가서 모든 일을 기억한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수영이나 자전거 타는 법과 같이 몸으로 익힌 것은 평생 잊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배워두면 머리는 까먹어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기억도 안 나고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를 것 같은데,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간 기억들을 되돌아보면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보다 부끄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더 생생하다. 창피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힘들면 몸이 지치니까, 단순한 사건의 머릿속 기억이 아니라 온몸이 아픈 지난날을 기억하는 것이다.


◇ 벌써 10월이다. 석 달만 지나면 또 한 살을 먹는다. 할머니나 어른들 앞이라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꼴이지만 “세월 정말 빠르다.” 이런 말이 여지없이 튀어나온다. 아마 서른 살, 마흔 살에도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한 해의 끝이 곧 보이니 지나간 시간이 다시금 무색하게 느껴진다. 쌀쌀해진 날씨만큼이나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을 되새겨보는 일을 잊지 말아야겠다. 하루하루 망각 속에서 살고 있지만 잊고 싶은 기억을 잊을 수 있기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게 정말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이 아니라도.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으로 기억하고 싶어질 또 하루를 살자.


 <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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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lver122@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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