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⑤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上)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⑤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上)
  • 김주언(교양학부)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10.04 14:13
  • 호수 13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만옥도 환호할 백석의 국수


장만옥도 환호할 백석의 국수

왕가위 감독이 만든 「화양연화」는 그 제목에서 받는 인상처럼 아름다움만을 전시하는 영화는 아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한다고 하는데, 영화는 우리에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이제 없고 다만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있었을 뿐이라고 쓸쓸한 어조로 속삭이는 것 같다. 「화양연화」의 러브 스토리에서 사랑처럼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잊혀져도 되는 추억으로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회한의 앙금으로 가라앉으며 어찌할 수 없는 애잔한 그리움의 무늬를 아로새겨 놓는다. 특히 이런 주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여주인공으로 분한 장만옥이 국수를 사러 가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다.


장만옥은 목까지 올라오는 치파오를 입고 어둡고 좁은 계단을 내려와 저녁 대신 먹을 국수를 사러 간다. 대사 한마디 없이 슬로 모션으로 흐르는 이 장면에 느린 왈츠풍 선율에 맞춰 요요마가 연주하는 첼로 음악이 흐른다. 치파오의 여인은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고 단지 스쳐 지나간다. 그녀는 걸어가는 것인가, 흐느적거리는 것인가, 아니면 유영하는 것인가. 음악처럼, 바람처럼, 화양연화의 시간이 사라져간다.


보온통에 국수를 사러 가는 장만옥을 우리의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보았다면, 그녀의 식욕을 아마도 다음처럼 ‘쓸쓸한 식욕’ 혹은 ‘적막한 식욕’이라고 이름붙였을 것이다:“모밀묵이 먹고 싶다./(…)/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食慾)이 꿈꾸는 음식.”(박목월, 「적막한 식욕」)


박목월의 「적막한 식욕」은 장만옥의 국수 사러 가는 적막한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적막한 마음을 미소짓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 ‘모밀’(오늘날 표준어는 ‘메밀’이다)을 좋아했고, 특히 ‘모밀국수’를 유난히 좋아했던, 박목월의 선배 시인 백석의 솜씨라면 사정이 다를 수 있다. 백석이 빚은 「국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국수’라기보다는 메밀을 주성분으로 만드는 ‘평양냉면’의 세계인데, 시종 경이와 기대의 흥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번민하는 장만옥도 이 백석이 내미는 국수 앞에서는 환호했을지 모를 일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국수」 중에서


<백석의 「국수」 이야기,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