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⑭ 이순신의 유적을 삼킨 일본
[신오도답파여행]⑭ 이순신의 유적을 삼킨 일본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0.04 14:16
  • 호수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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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산은 보존하고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곳


용산역을 출발한 KTX가 서서히 속도를 높이는 듯싶더니 서대전역에 정차했다. 광명역을 지날 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장마가 끝났는데도 비는 장마철보다 더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기차가 ‘노령(蘆嶺)’을 넘어갔다. 기차를 따라 움직이며 비를 뿌리던 구름은 이곳을 넘지 못했는지 ‘장성’을 지나면서부터 맑은 하늘도 보이고 빗줄기도 약해졌다.


자가용을 이용했던 지난 번 답사와 달리 기차로 가는 답사가 조금 낯설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가족과 함께 가려고 지난 번 답사에서 ‘목포’를 제외했는데, 방학의 중턱을 지날 때까지도 번잡한 일로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목포’를 향한 마음의 갈증만 커지고 있던 시점에서 ‘진도(珍島)’ 출신 친구가 부상(父喪)을 알려왔다. 다음날이 발인이라 하루 만에 돌아와야 하는 여정이었다. ‘진도’와 ‘목포’가 매우 가까운 곳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KTX를 타고 ‘목포’로 가서 구(舊) 시가지를 돌아보고, 밤에 ‘진도’로 가기로 했다.


‘익산역’부터 줄어든 승객은 ‘광주송정역’마저 지나자 네다섯 명 정도로 줄었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것을 느끼고 ‘목포(木浦)’에서 돌아봐야 할 곳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목포역’에 도착했다. 역사 안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답사 장소를 오르내리는 것이 불편할 것 같아서 카메라 장비만 꺼냈다.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구입한 것은 아니지만, 탄띠 형태의 카메라 가방에 필요한 장비만 챙겨 넣었다. 한결 몸이 가볍다.


역사를 나서니 햇살이 따가웠다. 문득 이광수의 행장(行裝)이 궁금해졌다. 오도답파여행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행장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광수는 충남, 전북을 거쳐 목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했고, 때로는 적지 않은 거리를 걷기도 했다. 일종의 배낭여행을 한 셈이다. 오늘날처럼 여행자를 위한 시설도 없었고, 다양한 편의용품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여행은 결코 편안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목포’에 도착하자 ‘적리(赤痢, 급성 전염병으로 발열과 복통이 심함)’로 앓아눕는다. 두 주 가까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매일신보』의 연재까지 중단할 정도였다. 염천의 계절에 서울을 출발해서 보름 넘게 삼도(충남, 전북, 전남)를 지나왔으니 여행이 아니라 고행(苦行)이었을 것이다.


이광수는 바다와 맞닿은 지점까지 돌산의 줄기를 내린 ‘유달산(儒達山)’의 모습에 경탄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지만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몸 상태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달산’의 모습을 ‘살은 말끔 깎이고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라고 적었다. 이 표현에는 ‘유달산’과 ‘장을 부여잡고 뒹구는 자신’이 동병상련의 처지처럼 느끼는 비애감이 담겨 있다. 게다가 병실 창밖의 쓰러져 가는 조선인 가옥은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개항지 ‘목포’의 조선인도 ‘군산’의 조선인처럼 일본인의 보조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식민지 조선인의 비애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며 씁쓸해 한다.


‘유달산’으로 오르다 보면 충무공 이순신의 전설이 담겨있는 ‘노적봉(露積峯)’을 지나야 하지만 이광수는 일부러 도외시했다. 그는 “아마 충무공(忠武公)이 저 최고정(最高頂)에서 다도해(多島海)를 부감(俯瞰)하였을 것이다” 정도로만 ‘노적봉’에 대한 감상을 적고 만다. 새롭게 조성되어 ‘고루거각(高樓巨閣)이 즐비한 일본인 거주지’에 비하여 ‘노적봉’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보다는 여행을 지원하고 있는 매일신보사의 눈치를 보았다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후일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격으로 이곳을 다시 찾았다. 오도답파여행과 달리 이곳의 이순신 유적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을 보면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유달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이난영 노래비’가 있는 곳으로 가자고 했더니, 기사는 생뚱맞다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하긴 유달산 중턱에 있는 비석으로 가자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1969년 국내 최초의 대중음악 노래비로 세운 ‘이난영 노래비’에는 대표곡인 ‘목포의 눈물’의 가사가 새겨져 있다. ‘목포’ 사람들은 ‘이난영(李蘭影)’의 노래를 즐겨 부르는데, 그것은 동향사람으로서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일이기도 하다. 목포에서 태어난 그녀는 조선 최고의 여가수로 성장했고, 그녀가 불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목포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처럼 ‘이난영’은 목포의 상징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설사 ‘목포의 눈물’에서 나오는 ‘삼학도(三鶴島)’가 민족의 아픔을 담고 있지 않은 곳이라 해도, 목포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유달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완만했다. ‘유달산’의 이순신 동상은 ‘노적봉’을 바라보며 오른손을 들어 세상을 평정하는 모습으로 서있다. 호방하면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무장의 모습을 강조하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가 들고 있는 무기가 칼인지, 창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신체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 칼은 손잡이마저 길어서 장검이 아니라 단도처럼 보일 정도이다. 1968년 광화문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동상은 오른손에 장검을 들고 있더니, 1974년 유달산에 세워진 동상은 단도를 들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민족정신 고양을 외치며 전국 각지에 동상을 세운 박정희 정권의 몰상식한 미감이 떠올라 씁쓸했다.


‘유달산’을 오르면서 ‘도쿄(東京)’ 인근의 ‘에노시마(江の島)’가 떠올랐다. ‘에노시마’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서 보았던 돌난간이 이곳에도 있다니…. ‘유달산’은 ‘목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즐겨 찾는 공원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유달산신사’를 조성하고 신사로 오르는 길에 돌계단을 쌓았다. 지금도 ‘유달산’에서 식민지배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이를 모두 들어내는 일이 능사일까? 오히려 ‘유달산’에 있는 식민잔재의 특성을 설명하고 우리의 문화와 비교해서 설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목포’를 비롯하여 식민지배의 유적이 많은 도시의 근대문화유산 복원은 외형 복원에만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현재의 시점에서 식민의 역사를 평가할 수 있게 하는 복원이 되어야 한다. 일본식 조경의 흔적을 적지 않게 유지하고 있는 ‘유달산’은 이런 점에서 보존하고, 경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곳이다. 식민 지배를 받았던 역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달산에서 본 목포의 구시가지. 왼쪽으로 노적봉과 삼학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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