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⑥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中)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⑥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中)
  • 김주언(교양학부) 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10.11 14:14
  • 호수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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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마음이 즐기는 평양냉면


의젓한 마음이 즐기는 평양냉면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백석의 「국수」 중에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평양냉면’이라고 하는 것은 메밀을 주원료로 만든 ‘물냉면’이다. 보통 감자 전분의 함량이 많은 ‘함흥냉면’이라고 하는 ‘비빔냉면’과 대조된다. 백석의 고향 평안북도는 메밀의 주산지로 정평이 난 관서지방이다. 메밀은 요즘은 기호에 따라 즐기는 음식 재료가 되었지만, 본래는 생육기간이 짧아 흉년에도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구황작물(救荒作物)이었다. 시를 자세히 읽어보면 백석은 평양 냉면을 메밀이라는 냉면 재료의 태생부터 음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인용 부분에서 ‘예데가리밭’이나 ‘산멍에’ 같은 말은 표준말 사용자에게는 해독하기 힘든 평안도 방언인데, 각각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과 ‘이무기’를 뜻한다. ‘예데가리밭’이란 거친 땅에서 잘 자라 병과 벌레가 잘 붙지 않는다는 메밀이 심어졌을 땅임에 틀림없다. ‘산멍에 같은 분틀’이란 이무기처럼 그 모양새를 쉽게 형용할 수 없는 분틀(粉틀), 즉 국수틀을 지칭함이 분명하다. 인용한 대목은 그러므로 메밀국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셈인데, 『동국세시기』는 11월 동짓달 편에서 “메밀국수를 무김치와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썰어 넣은 것을 냉면이라고 한다”고 전하고, 이어서 “평안도 냉면을 으뜸으로 친다”고 부기하고 있다.


  백석의 국수는 그러나 ‘메밀’이라는 식물의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은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오는 무엇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사 생멸의 과정이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식으로 동요가 없는 같은 리듬의 의미 행렬을 이루고 있음을 눈여져 보자. 사이좋은 친구처럼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이것이 정녕 삶과 죽음의 질서인가. 죽음은 삶에서 이탈하지 않고 삶은 죽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것들은 버성기지 않고 서로를 한몸으로 껴안고 있는 어떤 긍정이다. 이 긍정의 상태를 백석은 ‘의젓한 마음’이라고 부른다. 비로소 성숙한 마음자리에서 즐기는 요리가 백석이 그리는 평양 냉면의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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