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⑮ 아름다운 다도해
[신오도답파여행]⑮ 아름다운 다도해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0.11 14:16
  • 호수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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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절승 금강산에 비견 될만 했다

배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은
절승 금강산에 비견 될만 했다


  ‘목포’는 조선시대까지 무안군에 속해 있었다. 1897년 개항하면서 갯벌에 불과했던 곳이 남서해의 주요항구가 되었다. 일찍부터 일본은 ‘목포’의 지리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삼백년 전에도 왜군이 ‘목포’ 인근의 ‘율돌목’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에게 대패했을 정도로 이곳은 지리적 요충지였다. 1876년 조선이 쇄국의 족쇄를 풀고 부산, 인천, 원산을 개항했지만 일본은 ‘목포’의 개항도 추가로 요구했다. 남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지점이자 영산강을 통해 바다와 내륙을 연결하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복원 중인 목포 구 일본영사관.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의 요구로 쓸모없는 땅이었던 유달산 남쪽에 석축을 쌓고 항구를 만들었다. 목포항에서부터 유달산 비탈까지 새로운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개항장에 새롭게 조성된 주거지들이 그렇듯이 이곳은 일본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증가하자 일본은 이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영사관을 설치했다. 영사관은 목포항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인 거주지의 끝이자, 일본인 거주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세워졌다. 일제가 영사관을 세운 곳은 이순신의 전설이 전해져 오는 ‘노적봉’의 아래였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면서 그랬듯이, 이곳에 영사관을 세운 것이 조선민족의 역사를 지우기 위한 의도에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사관의 입지가 일본인 거주지를 조망할 수 있고, 목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목포’ 시가지를 둘러본 일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일별(一瞥)’ 혹은 ‘일순(一巡)’이란 표현으로 일괄할 뿐이다. 목포 유지들로부터 받은 후의에 감사하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서술한데 비하여 시가지 풍경 묘사는 거의 적지 않았다. 두 주 동안 병고를 치렀던 그의 처지에서 본다면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조선인의 분발을 촉구했던 그의 행적을 볼 때, 일본인이 주류를 이루는 ‘군산’처럼 ‘목포’에 대한 묘사도 의도적으로 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산’을 떠날 때 ‘목포’에서 신흥도시에 대하여 쓰겠다고 했지만, 신병 등의 이유로 서술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목포’로 불리어졌던 곳은 지금의 목포시 만호동, 유달동 일대이다. 지금도 근대 초기 서양풍 건물과 일본식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격자형 도시구조는 이곳이 계획적으로 조성된 곳임을 알게 해준다. 일제의 강제병합 이후 목포부청으로 바뀌는 영사관에서 부두까지 일직선으로 뻗은 도로 좌우로 우체국과 학교, 금융조합 등의 주요 기관들이 있었다. 오늘날까지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근대 유적은 대부분 근대문화재로 등록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목포의 근대 유적은 횅댕그렁한 모습이다. 이곳의 근대문화유산도 다른 지역처럼 외형보존에만 중점을 두고 있는 느낌을 준다. 특히, 현재 복원 중인 일본영사관 건물이 그랬다. 복원 방법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다고 하는데, 복원 이후의 활용 문제에 대해서도 많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걷어내고,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했으면 좋겠다.


 

▲목포항 여객 터미널.

구 영사관 건물에서 내려와 천천히 목포항 여객터미널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국제여객터미널은 한산했다. 가끔씩 선원처럼 보이는 외국인들이 한두 명씩 지나갔다. 이에 비하여  여객터미널은 다도해의 섬들로 가는 여객들로 북적였다. 이광수는 이곳에서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의 ‘순천환(順天丸)’을 타고 ‘여수(麗水)’로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경상남도 도청이 있는 ‘진주(晉州)’였다. 남해안 일대를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가 없는 상황에서 선박은 중요한 해상교통로였다. 서해와 남해, 또는 조선과 일본을 연결하는 연안해상교통로의 중요성을 인식한 일본은 ‘조선우선주식회사’를 세워 독점했다. 이광수가 승선했던 ‘순천환’은 ‘목포’와 ‘여수’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여객화물선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배를 타고 여수까지 갔고, 다시 ‘해신환(海神丸)’을 타고 삼천포, 통영, 마산 등으로 갔다. ‘순천환’은 ‘해신환’에 비하여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도해 노선을 오가던 순천환은 ‘율돌목’을 지나서 ‘완도(莞島)’와 ‘순천(順天)’을 들렀다가 ‘여수’에 도착했다.


  복잡한 해안 지형으로 유명한 이곳의 풍경에 그는 ‘미경(美景)’을 남발했다. 다도해의 자연 환경을 이용하여 관광산업과 수산업 등의 발전시키자는 그의 논리는 기실 조선총독부의 개발 방향이기도 했다. 일본은 섬유가 가늘고 길어서 상품성이 높았던 미국산 면화인 ‘육지면(陸地棉)’의 가치에 주목했다. 1899년부터 일본 영사 와카마츠 도사부로(若松兎三郞)가 고하도(高下島)에 시험 재배한 육지면은 1904년 재배에 성공한다. 재래종 목화를 밀어내면 조선의 남쪽 지방 곳곳에서 재배되었지만, 해방 이후 값싼 미국산 면화에 밀려 지금은 재배지를 찾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그는 ‘목포’를 지나면서부터 부쩍 이순신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다. 무너져 버린 전라 우수영의 고성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그곳을 찾지 못하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래도 배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낯설면서도 아름다웠던지 천하 절승 금강산(金剛山)과 비교하고, 반복해서 감탄사를 남발했다. ‘여수’로 향하는 배 위에서 맞는 일출과 일몰의 장관은 그의 예술가적 심미(審美) 의식을 돋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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