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⑦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下)
[김주언의 음식인문학]⑦ 백석의 「국수」와 국수 혹은 냉면(下)
  • 김주언(교양학부) 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11.01 14:31
  • 호수 131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슴슴함, 혹은 내적 초탈의 경지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이 그지없이 枯淡하고 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 「국수」 중에서

 

 

 

 평양냉면의 맛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백석은 먼저 ‘슴슴한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대체 ‘슴슴한’ 맛은 어떤 맛인가. ‘슴슴한’은 ‘심심한’의 북한어이다. 심심한 맛은 일단 순하고 착한 맛이다. 강한 개성으로 다른 맛을 압도하는 잘난 체가 없는 맛이다. 맵고 짜고 시고 단 것이 가진 자극성과 공격성에 길들여진 입맛이라면 아예 맛으로도 느낄 수 없는 처연한 맛이기도 하다. 때문에 단숨에 와 닿는 음식물과의 거친 접촉이나 감각적 충격만을 맛의 전부로 아는 혀에게는 적극적으로 감각조차 될 수 없는 맛이다. 심심한 맛은 스스로 맛을 낸다기보다는 다른 것들의 맛 속에 스며들어 자신의 존재가 우러나야 비로소 맛이 되는 맛이기도 하다. 이 겸손함에 다른 음식 재료들이 고명으로 끼어들 여지가 마련된다.


  저마다의 자극을 뽐내는 맛들은 누구나 음미하기 쉽지만 무미에 가까운 심심함과 싱거움은 가장 음미하기 어려운 맛이다. 음미란 무엇인가. 음미란 단지 먹는 것이 아니라 먹으면서도 먹기를 멈추는 것이고, 맛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맛의 바깥에서 맛의 안쪽을 분별해보고 가늠해보는 일인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심심함을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이렇게 특정한 맛이 아니라 맛없음의 맛에 유의하는 것은 즉각적인 감각의 판단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양의 지적 전통에서는 이러한 위반과 역전을 사물의 근본을 환기시키기 위한 역전으로 발전시켰다. 『중용』에는 “군자의 도는 심심하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君子之道 淡而不厭)”라고 적혀 있다.


  백석의 시에서 ‘슴슴한’ 것은 결국 ‘枯淡하고 素朴한 것’으로 귀결되는데, ‘고담’이란 ‘슴슴한’ 맛이 비로소 적극적인 가치로 인식되었을 때 가능한 표현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프랑수아 줄리앙에 의하면 ‘심심하다’, ‘싱겁다’라는 뜻을 가진 담(淡)은 중국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이다. 무미한 것, 초연한 것, 무위한 것이 기조를 이루는 이 담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는 정반대로 내적 초탈이라는 동양적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담(淡) 혹은 무미의 미덕은 우리의 정신을 사물의 더 근본적인 국면과 일치시키기 때문에 음식뿐만 아니라 삶에서 체험되는 무미함에 대응하는 것이야말로 내적 초탈의 기량이 된다. 백석의 평양냉면이 도달한 세계는 여기까지이다. 냉면에 서둘러 식초와 겨자를 섞어 흡입하기에 바빴다면, 이제 한번쯤은 이런 평양냉면의 세계를 음미해봄이 어떨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