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16)통영, 충무공의 도시
[신오도답파여행](16)통영, 충무공의 도시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1.01 14:37
  • 호수 1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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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신의 표상 이순신을 돌아보다

(16)통영, 충무공의 도시
민족정신의 표상 이순신을 돌아보다


‘통영(統營)’은 충무공의 도시이다. ‘이순신(李舜臣)’은 1592년 7월 8일 통영의 ‘한산도(閑山島)’ 앞 바다에서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도 대첩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하여 왜군의 서북진을 저지했다. 1955년부터 ‘통영시’를 ‘충무시(忠武市)’라 부르기도 했으니, ‘통영’은 충무공의 행적과 연관이 깊은 도시이다. ‘통영’이란 이름도 통제영이 옮겨 오면서 생겼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경준(李慶濬)은 이순신이 한산도에 최초로 설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을 통영반도로 옮겼다. 빈한한 농촌에 불과했던 이곳에 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조선 수군의 중심 기지가 되었다. 


‘삼천포(三千浦)’에서 하루를 유숙할까 하다 밤길을 달려 ‘통영’에 도착했다. 늦은 밤, ‘통영’으로 향하는 국도 77호선과 지방도 1010호선을 타려면 목숨을 저당 잡히고 가야 한다. 이 길은 굴곡이 많고 벼랑이 많아 위험하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한려수도의 풍광을 만끽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여유를 갖고 출발했다면 리아스식 해안의 절경을 눈에 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다음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접었다.  


밤늦게 도착해서 이곳의 명물 충무김밥을 먹었다. 속을 넣지 않은 밥에 참기름을 바르지 않은 김으로 감싼 김밥을 깍두기와 오징어무침에 곁들여 먹으면 담백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충무김밥은 이 지역 어부들이 즐겨 먹었던 음식이다.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은 밥이 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맨밥에 한 손으로 먹을 수 있는 크기의 김을 말았고, 이를 무김치와 주꾸미 무침 등과 곁들여 먹었다. 충무김밥이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5공화국이 개최한 관제축제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이제는 한국인의 별미가 되면서 충무김밥에 서려있는 어부들의 애환도 잊혀지고 있다. 


김밥을 사들고 ‘강구안(江口岸)’ 부두의 의자에 앉았다. 항구 한 쪽에 복원한 거북선과 판옥선이 야간 조명을 받고 떠 있다. 이 거북선은 2005년 11월까지 한강 거북선나루터에 있었다. 6공화국 당시 호국정신을 고취시킨다는 명목으로 건조된 이 거북선은 안전문제로 한강을 몇 번 떠다니지도 못하고 나루터에 매여 있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서울시가 기증해서 통영으로 옮겨 온 뒤에도 이 배는 여전히 항구에 매여 있는 시설물에 불과한 것 같다. 노를 젓는 목선에 모터를 달 때부터 자신의 몸에 달린 기계들이 ‘거북’했던 거북선은 여전히 ‘거북’한 모습으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도 거북선 복원사업을 둘러싼 잡음이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을 보면 호국정신 고취를 빙자한 사기극은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간직하고 있는 것인가 보다.    


충무공은 ‘성웅(聖雄)’으로 호명되는 순간부터 민족정신의 표상이 되었다. 국가의 멸망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신채호는 이순신을 근대 조선의 민족적 영웅으로 재창출했다. 그에 의하여 이민족의 침입을 막은 영웅으로 재등장한 이순신은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민족정신의 아이콘으로 작용했다. 이광수도 1931년 <동아일보>에 장편소설 『이순신』을 연재하기 이전부터 충무공을 흠모하는 마음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미 ‘통영’을 찾기 전부터 이순신을 의식하고 있었다. ‘목포’를 떠나 ‘울돌목’을 지날 무렵, 그는 이순신을 명장(名將)으로 소개하면서, 13척의 전함만으로 승리를 이끌었던 노량해전의 유적지를 찾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통영’ 연재문의 첫 문장을 “이름도 좋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곳이다”라고 하며 반가운 기분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그가 ‘통영’을 찾았을 때 충무공 관련 유적은 황폐해진 상태였다. 1895년 통제영이 폐지되면서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하던 충렬사(忠烈祠)의 관리도 부실해졌기 때문이다. 충렬사 회랑에는 똥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불결했고, ‘청초를 헤치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이광수는 황량한 충렬사에서 모자를 벗고 충무공의 위패를 우두커니 바라본다. 통영 서쪽 대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있는 충렬사의 분위기는 아름답지만, 슬픈 소리만 들린다고 표현(忠武公 옛 祠堂을 어느 곳에 찾을는고 / 統營城 西門 밖에 竹林만         하다 / 階前에 低首 徘徊하올제 杜鵑 一聲)하는 그의 속내는 복잡하다. 충렬사를 묘사하는 자신의 글조차도 “화호유구(    虎類狗; 이광수는 畵虎爲狗로 쓰고 있다)”라며 충무공의 유적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왜적을 물리쳤던 충무공과 일제의 지원을 받는 자신이 대비되기도 했을 것이다.


▲남해안 어업의 중심항구인 통영의 강구안.
아침햇살이 강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텔 창밖으로 ‘강구안’의 부두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호텔 지배인은 사진기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보라고 한다. 옥상에 올라서니 통영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통제영의 중심건물이었던 ‘세병관(洗兵館)’이 여황산에서 내려오는 산세에 의지하여 우뚝 서있다. 팔작지붕을 석회로 마감한 세병관의 기와지붕은 경회루의 선을 닮았다. 여황산 자락부터 해안까지 적지 않은 다층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세병관의 위엄을 해치지 않아서 보기 좋다. 

 


▲경회루의 지붕선을 닮은 세병관.
우뚝하니 통영바다를 바라보는 자태에 끌려서 ‘세병관’부터 찾았다. 면 9칸, 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의 중앙부 뒤쪽에 궐패(闕牌: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闕’ 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패)를 모시는 단을 설치한 점이 특이했다. 명나라의 원조로 패망을 면했던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 햇볕이 건물 내로 스며들면서 우물마루가 빛에 반짝이기 시작했다. 세병관에 앉아 통영바다를 굽어보니 여러 섬들에 가려 내해처럼 보이는 통영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사람조차 없는 통제영 건물에서 분주함이 넘치는 ‘통영항’을 우두커니 내려다 보다 ‘한산도’로 가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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