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17) 달 밝은 한산도에서 충무공을 생각하다
[신오도답파여행](17) 달 밝은 한산도에서 충무공을 생각하다
  • 김재관(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1.11.08 18:41
  • 호수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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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제향 공간에 불교적 제단이?


  아침도 먹지 않고 세병관 일대를 돌아다니다, 정작 ‘한산도(閑山島)’ 가는 배를 타려니 배가 고프다. 시원한 매운탕을 먹고 싶었지만, 배를 놓칠까봐 충무김밥을 아침 겸 점심 대용으로 샀다. ‘강구안’ 포구를 따라 만들어진 해안도로를 벗어나니 ‘통영항여객선터미널’이 보였다. 승선권을 파는 아가씨가 ‘출항시간이 삼분밖에 안 남았다고 빨리 가라’고 재촉한다. 이 배를 놓치면 꼼짝없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부리나케 뛰었더니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골송골 흘러내렸다. 가쁜 숨을 고르면서 상갑판으로 올라갔다. 평일이라서 승선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뭍으로 일을 보러 나왔다 돌아가는 한산도 주민들과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관광객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종이에 싼 충무김밥을 풀었다. 바다를 바라보며 허기를 달래는 것도 나름대로 운치 있어 보인다.


  배의 고물에 서서 배의 꽁무니에서 뿜어져 내오는 하얀 물거품을 본다. 이광수는 통영경찰서에서 마련해준 경비함 ‘第四鵲丸’을 타고 한산도로 가면서 통영의 바다를 ‘天無雲 水無波, 땅 밑까지 보일 듯이 透明한 綠水’라고 묘사했다. 예나 지금이나 바다는 잔잔한데, 짙은 암녹색을 띠고 있는 바닷물은 수심을 알 수 없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배들의 왕래가 잦아진 결과인지 알 수 없다. 통영의 바다에서 거센 파도가 일지 않는 이유는 섬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여황산(艅     山)’과 ‘남망산(南望山)’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내린 곳에 내항인 ‘강구안’이 있고, 이곳을 벗어나도 ‘미륵도’가 다시 통영항을 감싸고 있다. 통영항을 벗어나면 한산도와 거제도 등의 섬들이 ‘통영’의 바다를 겹겹으로 감싸고 있다. 또한 바다 근처에서 넓게 산자락을 펴고 사람들을 품은 통영의 산세는 안온한 느낌을 준다. 이곳 사람들은 통영의 바다와 산이 만들어 놓은 자연의 형상을 해치지 않게 건물을 지어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통영의 아름다움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다로 나와서 보니 이곳이 ‘미항(美港)’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한산도 근처에는 거북선 모양의 등대가 암초에 서있다. 등대가 있는 곳은 한산도 대첩 당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가 이끄는 왜군이 조선수군에 의해 괴멸된 곳이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민족정신을 고취시킨다는 명목으로 전국에 산재한 충무공 유적을 복원했고, 한산도 일대의 유적을 복원하면서 이 등대를 세웠다. 박정희 정권이 복원한 대부분의 문화유적이 그렇듯이 이 등대도 겉모습만 유사하게 한 모조품이다. 생김새도 기이하다. 굳이 등대를 거북선 모양의 등대로 세워야만 했을까? 등대를 세우면서 기단부인 거북선 모형과 갑판 위로 솟은 등대의 조화를 모색할 수 없었을까?  


  한산도 제승당(制勝堂) 포구에 도착했다. 통영경찰서에서 마련해준 경비함을 타고 도착한 이광수는 이곳의 경관에 매료된다. ‘      圓形의 透明한 灣內에 오똑 솟은 半島가 鬱蒼한 樹林 속에 묻혀있다’고 묘사하며 제승당이 서있는 곶의 풍치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그의 표현처럼 제승당 아래에 있는 해만(海灣)은 바다임에도 물결이 내호(內湖)처럼 잔잔한 곳이다.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물은 제승당이 있는 산자락의 음영을 머금고 있다. 상록의 송림과 또 다른 상록의 바다를 가르며 휘돌려진 황토빛 길에는 배롱나무 꽃이 한창이다.


  대첩문(大捷門)을 지나 제승당 경내로 들어섰다. 수루(戍樓)에 올라 통영만의 바다를 바라보니, 충무공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웠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부산에서 전라도로 가는 배들은 반드시 통영바다를 지나야 했다. 통영 반도와 거제도 사이의 좁은 해협인 ‘견내량(見乃梁)’을 빠져 나온 배들은 통영바다를 만났고, 미륵도와 한산도를 지나야만 ‘사천(泗川)’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곳은 복잡한 지형과 안개에 익숙한 조선 수군이 승전을 거둘 수 있는 최적지였고, 부산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까지 충무공은 이 바다에서 왜군을 섬멸했다. 충무공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곳에 군영을 세워 무기를 제조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왜군의 전라도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충무공이 파직되고, 원균이 지휘했던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수군이 대패하면서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도 파괴되었다. 통영에 통제영이 설치되었지만 파괴된 한산도의 통제영 건물들은 복원되지 않았다. 1740년 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은 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왜군이 파괴했던 통제영 자리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또한 통제영의 지휘소 건물이었던 ‘운주당(運籌堂)’ 터에 건물을 건립하고 제승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건물이 언제까지 보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광수가 이곳을 찾았을 당시까지만 해도 조경이 중건한 건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승당은 보존되고 있었다. 충무공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를 ‘한시로 옮겨(閒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 心愁時 何處一聲     笛添人愁) 새긴 현판이 제승당에 걸려 있다’고 이광수는 적고 있다.   

▲운주당 터에 중건한 제승당.

  현재 우리가 접하는 제승당과 부속건물은 1976년 조성된 것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교육이념으로 선전했던 유신정권은 민족수난극복의 영웅들을 새롭게 만들어 내거나 재창조했다. 그 중에서도 충무공은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그와 관련된 유적이 성역화 사업의 주요 대상이었다. 시멘트콘크리트로 세운 제승당과 부속건물들은 이 때 지어진 것이다. 영정을 남기지 않았던 충무공은 ‘순신의 사람됨엔 대담한 기운이 있어’라는 『징비록』의 구절을 근간으로 재현되었다. ‘충무사(忠武祠)’에는 유신정권이 지정한 충무공의 표준영정이 보상화(寶相華) 문양의 제단 위에 배향되어 있다. 유교적 제향공간에 불교의 제단이라! 유신정권은 충무공을 정권유지의 아이콘으로만 활용하려고 했고, 제승당 일대를 콘크리트로 도배했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단청으로 건물을 장식했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씨를 읽는 현판의 서각을 반대로 파서 건물에 달았다. 또한 초가집이었던 곳은 기와집으로 바꾸어서 위용을 갖춘 군영처럼 꾸몄다. 활터에 단청을 칠하고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을 복원이랍시고 해놓은 것을 보니 그 발상의 유치함이란….

 김재관(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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