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⑧ 백석의 「선우사」와 가재미(上)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⑧ 백석의 「선우사」와 가재미(上)
  • 김주언(교양학부·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11.09 03:08
  • 호수 1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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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의 후배 백석의 가능성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 「선우사」 중에서

백석은 정주(定州) 사람이다. 시인 백석의 고향 평북 정주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우리 근현대사의 많은 인사들이 정주 출신이다. 이광수, 김억, 김소월, 선우휘 등은 비교적 잘 알려진 정주 출신 문인들이다. 문인뿐만이 아니다. 해방 후 고려대 초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통일교 교주 문선명, 소설가 이인성의 아버지인 역사학자 이기백, 국어학자 이기문(이기백의 동생), 백병원 설립자인 백인제(문학평론가 백낙청의 백부)가 모두 정주 출신이다. 특히 백석과 백낙청은 본관이 같은 수원이기 때문에 이들은 친인척 일가 관계일 개연성이 높다. 백석은 이 유서 깊은 땅 정주에서 「정주성(定州城)」으로 데뷔한다.

시인 백석의 데뷔작이 「정주성」이라는 사실은 특기할 만한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 문단은 모더니즘이 풍미하던 시대였고, 저마다 서구화되지 못해 안달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에 일본 유학을 해 영문학을 전공하고 제임스 조이스도 소개한 이력이 있는 백석은 세계의 중심이 서구에 있다는 데 동의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동네 이야기를 한 셈이다. 백석의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가장 비근한 것이 가장 비범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백석은 어떻게 알았을까?     

백석에게는 무엇보다도 김억-김소월로 내림되는 정주의 명문 오산학교의 전통이 있다. 김소월의 스승 김억은 제자 김소월을 발굴했고, 백석은 같은 학교 선배인 김소월을 몹시 선망했다고 한다. 선배란 무엇인가. 좋은 선배란 약자 후배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강자인 것이 아니라 후배가 진정 존경하고 닮고 싶어하는 역할모델인 것이다. 백석은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고 소월을 낳은 정주 땅에서 자란 시인이다. 김억, 김소월이 바로 민요시인이었고, 특히 김소월은 기층민중의 생활언어로 일가를 이룬 시인이었다. 「정주성」으로 데뷔한 백석은 데뷔 후에도 평북 방언을 모르고서는 많은 부분이 해독 불가능한 시를 썼다. 이 자신감은 가장 비근한 것을 가장 비범한 것으로 일궈내는 저 선배시인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찮은 반찬과 친구가 되어 있다는 「선우사(膳友辭)」라는 작품도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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