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 (18)환락과 타락의 도시로 전락하다
[신오도답파여행] (18)환락과 타락의 도시로 전락하다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1.15 14:46
  • 호수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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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보다 문명화를 선행하다

 
  진주(晉州)는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되기 전까지 경상남도의 중심도시였다. ‘진주’와 관련된 역사기록들을 살펴보면 이곳이 정치·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 전투’가 있었을 정도로 ‘진주’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지리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바다와 내륙의 물류들이 교역하는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즉 ‘사천(泗川)’과 ‘산청(山淸), 함양(咸陽), 의령(宜寧), 합천(陜川)’ 등은 ‘진주’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1876년 개항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한 ‘부산(釜山)’과 ‘마산(馬山)’에 경제적 주도권을 뺏기고, 도청마저 옮겨 가자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산’을 떠나 ‘진주’로 가는 길은 쾌적했다. 직선화된 남해고속도로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 보니, 굴곡과 오르막이 심하고 자갈도 많아 ‘삼천포(三千浦)’에서 ‘진주’까지 ‘七八里 距離에 凡 六時間이 걸렸다’던 이광수의 불평이 떠올랐다. 배를 타고 ‘여수(麗水)’에서 ‘삼천포’까지 왔던 그는 자동차를 타고 경남도청이 있던 ‘진주’로 갔다. 적어도 1923년 조선철도주식회사에 의해 ‘마산’과 ‘진주’를 잇는 경전남부선이 개통되기 이전까지 ‘진주’를 잇는 근대교통로는 이 길밖에 없었다. 험준한 산악 지형을 지나야 하는 옛길은 불편했고, 사천만을 따라 부설한 신작로는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부산, 마산 등의 도시를 빠르게 연결하는 통로였다. ‘삼천포’에서 ‘진주, 통영, 마산’으로 갔던 이광수의 여정과 달리, 나는 ‘마산’을 답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경남 서부에서 동부로 이어지는 해안 도시들을 경유하는 여정을 이어갔다. 철도와 신작로 등의 근대적 육상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남과 경남 내륙의 교통여건 탓에 그는 여전히 조선시대처럼 해상교통에 의존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비록 돛배가 아닌 기선(汽船)으로 바뀌었지만, 남해안의 여러 도시를 경유하는 배들은 여전히 예전의 뱃길을 따라서 오갔다. 


  굽이쳐 흐르는 남강(南江)변 길을 따라 간다. 멀리 촉석루(矗石樓)가 보였다. 촉석루는 진주의 항일정신을 담고 있는 상징적인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등은 이곳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 남강으로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또한 의기(義妓) 논개(論介)는 성이 함락된 이후 왜장 게야무라 후미스케(毛谷村文助)를 촉석루 아래 의암(義巖)으로 유인하여 투신하였다.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여명의 관군과 주민을 통솔하여 7일간의 격전 끝에,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이끄는 2만 명의 왜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곽재우(郭再祐)와 최경회 등이 성 밖에서 왜군을 교란하면 지원했던 1차 전투와 달리, 외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던 2차 진주성 전투는 최경회, 황진(黃進)이 이끄는 관군과 김천일이 이끄는 의병 등 3천5백 명의 군사와 6만 명의 주민이 분전했지만 패배했다. 1차 전투의 승리와 비록 패했지만 최후까지 저항했던 2차 전투는 진주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 근원이기도 했다.


  이처럼 진주성과 촉석루는 조선인의 반일정신을 담고 있는 공간이자 상징적 표상이었다. 일제는 한일병합 이후 논개를 추모하는 공식행사인 ‘의암별제(義巖別祭)’를 중단시킬 정도로 진주 사람들의 항일의식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경상남도 경부부장 스이코우(水香)는 이광수에게 오도답파여행을 하면서 조선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는지 물어보며, 위험사상을 가진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펼치는 사회활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에 대하여 이광수는 그들이 이미 항일의식을 버리고 온건해졌으며, 조선을 부(富)하게 하기 위하여 산업발달, 교육보급, 사회개량 등에만 주력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그의 이런 발언은 매일신보의 후원을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문명화를 독립보다 선행하는 과제로 보았던 그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의 문명관은 일제의 식민지 문명화 기획과 유사했고,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진주의 청년들이 이를 실현할 기상이 없다며 비난한다. 그는 ‘진주’ 청년들이 조상의 전답을 쪼개 팔은 돈으로 맥주나 마시고 난봉가나 부르며 주색잡기에 빠져 신문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이광수의 생각은 일본인 경남도장관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장관은 경상남도의 완고한 유생들이 일제가 펼치는 신정(新政)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식들에게도 근대교육을 시키지 않는 ‘두문둔세객(杜門遁世客)’이라고 비난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유력한 유생을 불러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설명하였더니 적극적으로 호응하더라고 자랑한다. 현재 경상남도 관할 각 군의 대표가 되는 유생을 진주로 불러들여 타이르는(說諭) 중이며, 앞으로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뜻처럼 될지는 모르겠다고 의구심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광수와 같은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조선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도장관과 면담을 위해 이광수가 지나갔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 문루를 지나 촉석루에 올랐다. 촉석루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리 더운 날에도 시원한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촉석루는 남녀노소가 그득히 모여서 잡담도 하고 낮잠도 잔다’는 그의 말처럼 남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구월 중순의 무더위를 식혀줄 정도로 시원했다. 이광수는 촉석루를 ‘晉州의 主人’이라고 말했다. 오늘날도 촉석루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촉석루를 빛나게 하는 것은 진주 사람들이 이곳을 오르면서 만들어낸 은은한 빛의 마루이다. 촉석루를 세웠던 선조들의 공적도 높게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이곳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는 진주 사람들의 마음이 있어서 촉석루는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다. ‘영남제일형승’은 촉석루에서 바라보는 남강과 그 주변 풍광만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광수가 칭송한 저녁 안개 서린 건너편 대숲의 풍경일 수도 있지만, 촉석루를 사랑하는 진주 사람들의 마음의 풍경을 따를 수는 없다.

▲진주의 주인인 촉석루 루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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