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19)부산과 경쟁하라
[신오도답파여행](19)부산과 경쟁하라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1.22 14:15
  • 호수 1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인들에게 최적의 거주지였던 ‘마산’

  ‘마산(馬山)’행 KTX열차는 ‘동대구(東大邱)’에서 경부고속철도와 갈라져서 기존의 경부선 철도 구간으로 들어섰다. 이윽고 ‘밀양(密陽)’을 지나자 ‘삼랑진(三浪津)’에서 다시 ‘경전선(慶全線)’으로 올라탔다. 기차가 낙동강 철교를 지날 때, 문득 이광수의 장편소설 『無情』에 묘사된 삼랑진 홍수장면이 떠올랐다. 범람하는 낙동강은 삼랑진에서 모든 것을 삼킬 듯이 휩쓸고 내려가는 상황을 이광수는 안타깝게 묘사했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은 이곳에서 홍수피해를 입은 조선민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슬퍼하고,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조선의 등불이 되자고 ‘선형, 영채, 병욱, 우선’ 등과 맹세했다.


  ‘삼랑진’은 ‘함안(咸安)’에서 남강(南江)과 만나 몸집을 불린 낙동강이 밀양강과 만나는 지점이자, 만조 시에는 낙동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온 바닷물과 만나는 지점이다. 그래서 지명도 세 갈래의 물길이 만나는 지점의 나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무정』의 홍수 장면이 묘사된 내용이 연재된 날로부터 두 달 뒤 이광수는 ‘삼랑진’에 도착했다. ‘통영’을 떠나 ‘마산’에 도착한 이광수는 ‘부산’으로 오고 있던 ‘매일신보탐량단(每日申報探凉團)’과 합류하기 위해 ‘삼랑진’으로 출발했다. 이광수는 ‘삼랑진’에 도착해서 빙수와 구운 메기로 허기를 달랬다. 이곳에서 그는 두 달 전 연재를 마친 『무정』의 삼랑진 장면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두 달 전 매일신보에 연재했던 『무정』의 홍수 장면과 달리 삼랑진을 흐르는 낙동강은 메말라 있었다. 1917년 상반기 내내 가물었던 탓에 낙동강의 인근의 지천들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낙동강마저도 말라가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오랜 가뭄에 농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광수는 ‘마르겠거든 다 말라라, 한 방울 없이 말라라 하고, 공연히 화증(火症)을 내어 본다’고 적었지만, 그는 자연재해 앞에 속수무책인 조선의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에게 있어서 수재(水災)이든, 한재(旱災)이든 조선민족이 고통 받는 상황은 같았을 것이다. 


  ‘동대구’를 지나면서 부쩍 줄었던 승객들은 대부분 창원역에서 내렸다. ‘마산·창원·진해’가 ‘창원(昌原)’으로 통합되면서 창원만 커졌다고 하던데, 기차승객만 봤을 때는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산역에 내려서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분주하게 돌아봐야 하는 답사를 떠나려면 속부터 채워야 했다. 몇 해 전 마산에 정착한 선배의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하기로 하고 택시를 탔다. 완월동에 있는 선배 가게로 가는 길은 무학산(舞鶴山)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어서 가파르고 굴곡져 있었다. 이 길을 빠른 속도로 내달리며 기사아저씨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마산’의 쇠퇴를 한탄했지만,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나의 심신은 아저씨의 푸념을 들어줄 여유조차 없었다. 


  선배의 가게는 바닷가의 평지가 끝나고 무학산의 산세가 가파르게 시작되는 지점에 있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나의 답사 계획을 들었던 선배가 자신의 오토바이를 끌고 나왔다. 내가 답사할 지역은 오토바이로 다니는 것이 편하다며…. 가파른 길을 내달리는 선배의 등을 부여잡고 마산항 쪽으로 내려갔다. 바다 쪽에서 본 무학산은 생각보다 큰 산이었다. 넓게 날개를 펴고 바다를 향해 내려앉는 학의 모습을 하고 있는 무학산을 이광수는 ‘선미(仙味)있는 산’이라고 지칭했다. 바닷가에서부터 치고 올라가는 무학산의 산세는 통영의 ‘여황산(艅    山)’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조선 현종 대에 조창(漕倉)이 설치되면서 남해안의 주요 포구가 된 ‘마산’은 1899년 개항이 되면서 조선의 주요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개항장이 그렇듯이 마산에서도 조선인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마산의 상권은 공동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거류 외국인의 대부분이 일본인일 정도로 일본자본의 영향 아래 있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 말기 ‘박기종’ 등이 중심이 된 영남지선철도회사에서 추진하고 있던 마산과 삼랑진 간의 철도마저도 러일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일본군이 부설권을 빼앗아 건설하면서 마산에서 일본자본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일본인들은 무학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바다와 만나기 직전, 좁게 평지를 이룬 ‘월영리’와 ‘신월리’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들이 이곳에 정주하게 되면서 마산 사람들은 조선인 거주지역을 ‘구마산(舊馬山)’, 일본인 거류지역을 ‘신마산(新馬山)’으로 불렀다.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합포(合浦)’ 일대에는 여전히 조선인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었지만, 일본인 거류지역인 신마산에 비하여 도로는 좁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신마산’은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며, 항상 청결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성장세를 거듭하던 ‘마산’은 한일병합 이후 개항장에서 제외되면서 정체기를 맞게 된다. 일제는 한일병합에 관한 선언에서 기존의 개항장에서 ‘마산’을 제외했고 대신에 ‘신의주(新義州)’를 개항했다. 하는 조치를 취했다. ‘진해(鎭海)’에 군항(軍港)을 건설하면서 군사시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인근에 있은 마산항의 개항을 취소한 것이다. 여전히 ‘오사카’를 오가는 일본 선박들이 마산항을 드나들었지만, 개항장이 폐쇄되면서 ‘마산’의 상권은 예전에 비하여 약화되었다. 조선인 인구는 변동이 거의 없었지만 일본인 인구는 40%나 줄었고, 신마산에 거주하던 일본인들 중 일부는 가옥을 해체하여 부산이나 대구로 떠나기도 했다.


  이광수가 이처럼 정체기를 겪고 있는 시기에 ‘마산’을 방문했다. 그래도 이곳의 유지들은 이광수에게 ‘마산’을 “山水明媚하고 氣候 좋기로 朝鮮 第一이라”며 소개한다. 그래서였을까? 상권이 약화된 상황에서도 이곳에 계속 머물렀던 일본인들은 ‘온화한 기후와 풍광, 신선한 식품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들이 살았던 일본의 기후와 유사하면서 식민지배자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마산’은 그들에게 최적의 주거지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이웃에 있는 ‘부산(釜山)’에 비하여 성장세가 꺾여 있던 상황이 답답했나 보다. 그들은 ‘진주’에 있는 경남도청을 옮겨서 ‘마산’을 경남의 중심도시로 삼고, 1925년 마산과 진주를 잇는 철도가 개통되자 ‘순천(順天)’과 ‘전주(全州)’까지 포괄하는 상권을 구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해 경남도청이 ‘부산’으로 이전하고, 전라도와 연결하려던 철도 건설마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활로를 모색했던 ‘마산’의 움직임은 1970년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될 때까지 정체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마산선의 종착역이자 마산상권의 중심이었던 옛 신마산역 부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