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20)온천관광의 시대가 열리다
[신오도답파여행](20)온천관광의 시대가 열리다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11.29 14:12
  • 호수 13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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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탕에 몸을 담그고 암울한 조선을 잊다

  ‘마산(馬山)’에 도착한 이광수는 지체하지 않고 ‘동래(東萊)’부터 찾았다. 경성일보와 매일신보가 공동으로 기획한 ‘동래해운대탐량단(東萊海雲臺探凉團)’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적리(赤痢) 때문에 ‘목포’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면, 그는 남해안의 여러 도시를 여유를 갖고 둘러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매일신보사의 요청으로 7월 29일 오전 6시 15분 부산역에 도착한 ‘탐량단’과 합류하기 위해 ‘마산’에서의 일정을 뒤로 미룬다.


  ‘京仁人士가 一團이 되어 兩社 主催로써 溫泉場과 海水浴場인 東萊, 海雲臺의 二勝地’에서 휴가를 즐기려는 ‘탐량단’ 회원의 대부분은 식민지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다. 조선인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貴族)이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었고, 일본인은 관료와 민간인을 포함한 단체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특별 열차를 편성하고 관람객을 모집한 ‘탐량단’은 유흥과 오락에 초점을 맞춘 투어상품이었다. ‘해운대’와 ‘동래온천’에서 해수욕, 온천욕, 연회를 즐기는 일정은 문명 시설 시찰 등의 명목으로 기획했던 ‘시찰단’과 출발 지점부터 달랐다. ‘탐량단’은 「오도답파여행」이 연재되던 시기, 매일신보에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한강관화대회(漢江觀火大會)’, ‘회유관월회(廻遊觀月會)’ 등의 오락상품을 장거리 여행과 결합시킨 투어상품이었다.


  이러한 여행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던 시대’에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방식과 달랐다. 근대 이전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에서 조우할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선지자들의 여행기를 참조하기는 했다. 그렇지만 철도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낯선 공간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별’을 찾지 않았다. 그들은 ‘브래드쇼(Bradshaw’s Monthly Railway Guide, 1839년 영국에서 창간되어 1961년 폐간한 철도여행안내서)’ 등의 안내서를 이정표로 삼았다. ‘토마스 쿡(Thomas Cook)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하면 이마저도 필요 없었다.


  그렇다고 여행이 예정대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브래드쇼’ 등의 여행안내서가 ‘밤하늘의 별’을 대체했지만, 돌발적인 상황은 상존하고 있었다. ‘쥘 베른(Jules Verne)’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1873)에 등장하는 ‘필리어스 포그’도 각국의 철도와 기선의 운행시각을 알려주는 ‘브래드쇼’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 나온 시각표를 바탕으로 80일 만에 세계를 일주한다. 그의 여행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있는 기차와 기선의 출발시각에 맞춰져 있었다. 그렇지만 ‘쥘 베른’은 이 소설의 곳곳에 변수를 배치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여행의 재미를 전달했다.


  만약 ‘필리어스 포그’가 1841년 창업한 ‘토마스 쿡(Thomas Cook) 여행사’의 패키지 상품을 이용했다면 어땠을까? 교통·숙박·식사 등을 여행자 스스로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패키지여행을 이용하는 식으로 묘사가 되었다면 『80일간의 세계일주』는 평범한 여행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포그’ 식의 여행을 자유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80일 만에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그의 발상은 이미 세계투어 여행상품을 출시한 ‘토마스 쿡 여행사’의 투어 방식을 변용한 것이었다. 1872년 근대 투어리즘(tourism)의 지평을 개척한 ‘토마스 쿡 여행사’는 기선(汽船)을 이용한 222일간의 세계여행을 성공시켰고, 영국인들에게 세계 여행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행은 교통수단과 숙박업소 등에 단체 할인제도를 도입하여 경비를 줄이고, 보다 많은 여행 수요를 창출하는 패키지여행을 영국에서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토마스 쿡’ 식의 패키지여행이 확산되기 위해서는 교통수단과 숙박업소, 식당 등이 구축되어 있어야 했다. 식민지 조선에 근대적인 투어여행이 등장한 시점도 ‘X자형’의 간선철도망이 구축되면서부터이다. 이광수가 ‘탐량단’과 합류한 ‘동래온천’이 식민지 조선의 근대 투어리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경부선의 시발점인 ‘부산역’과 ‘동래온천’ 사이에 경편철도가 운행되면서 일본식 온천관광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탐량단’이 묵고 있던 봉래관(蓬萊館)은 도요타 후쿠타로(豊田福太郞)가 세운 규모가 큰 온천장이었다. 기계로 온천공을 굴착해서 원수(原水) 문제를 해결하면서 대규모 욕장(浴場) 시설을 갖출 수 있었던 이곳은 동래온천을 대표하는 온천장이 되었다. 도요타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부산역에서 이곳까지 경편철도를 부설하기도 했다. 그는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 근대여행업의 중심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온천관광이 철도교통과 결합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탕치(湯治)나 참배 여행 중에 잠깐 들리는 곳에 불과했던 온천은 전국적인 철도망이 구축되면서부터 근대 투어리즘의 중심공간이자 대중적인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래’는 일본인의 수가 많았던 ‘부산’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예부터 온천이 있었던 곳이라 온천관광의 최적지였다. 온천의 개발은 온천장 시설을 세우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동래의 온천이 개발되면서 일본풍의 온천문화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온천장은 목욕만 하는 곳이 아니었다. ‘앞뒤를 터놓은 넓은 방에 「유카다」(浴衣)를 입은 호한들이 가로 세로로 누워 코를 골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뒹구는 곳에서 기생이 공연을 하는 유흥문화도 수입되었던 것이다.


  ‘탐량단’이 행태에 싫증을 느꼈기 때문일까? 이광수는 유흥이 펼쳐지고 있는 방을 빠져나와 욕탕에 몸을 담그고 암울한 조선의 현실을 잊고자 한다. ‘世外의 境에 世外의 人이 되어, 힘껏 마음껏 淸風明月의 快에 醉하고’자 하나, 여행이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듯 그의 상상은 식민지 조선의 현실 밖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봉래관 자리에 세워진 농심호텔과 허심청(출처:농심호텔 홈페이지).
   

▲일제강점기 동래 지역 최대 규모의 온천장이었던 봉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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