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에 처한 젊음에게 띄우는 희망의 편지 - 정주백 동문
역경에 처한 젊음에게 띄우는 희망의 편지 - 정주백 동문
  • 권예은 기자
  • 승인 2011.12.06 14:29
  • 호수 13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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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기 위해 항상 갈구하고 갈망하라

꿈을 이루기 위해 항상 갈구하고 갈망하라

"잘 나가던 회사 그만두고 사업 시작,
그리고 네번의 연이은 실패 마흔 아홉 신용불량자가 다시 일어섰다"

역경에 처한 젊음에게 띄우는 희망의 편지 -에스엘비코리아 대표 정주백(국어국문·82졸) 동문

역경에 처한 젊음에게 띄우는 희망의 편지 -에스엘비코리아 대표 정주백(국어국문·82졸) 동문

 

 안 해본 게 없다. 과일장사, 미니슈퍼, 빵집, 다단계까지…. 잘 다니던 회사에 미련 없이 사표를 내던진 그는 인생의 고행길에 접어들었다. 수없이 넘어졌다. 그리고 일어났다. 신용불량자의 바닥에서 연매출 35억 원에 달하는 굴지의 샌드위치 전문 기업을 키워낸 정주백 동문을 만나 굴곡진 인생담을 들어보았다.

▲지하철 교대역 4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멜랑제’를 찾을 수 있다. 샌드위치 카페 멜랑제 1호점 매장에서 정주백 동문.

 

 

 

-단국대학교 학생때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다. 대학 시절은 어땠나.
  아버지께서는 내가 공무원이 됐으면 하셨다. 그래서 국문과이면서도 고시의 꿈을 키웠다. 당시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학비를 벌어가면서 공부해야 했다. 과외 선생으로 여러 군데 뛰며 주말에도 공부에 파묻혀 지냈다. 법대도서관에 ‘정주백’ 지정석이 있을 정도였다. 도서관에서 묻힌 세월이 참…. 어디 엠티를 갔다거나 미팅을 했다거나 낭만적인 캠퍼스의 추억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돌이켜보니 너무 재미없는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한편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아나운서도 한번 해보고 싶어 MBC 아나운서 시험도 봤다. 그러나 최종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고, 준비하던 고시도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졸업과 동시에 나에게는 취업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화장품 회사 영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화장품 회사에 들어간 이유가 있나.
  지원했던 많은 회사에 필기시험은 모두 합격했다. 고르기만 하면 됐다. 대학 시절 미팅 한 번 못해 봤던 기억을 떠올리며 여직원이 많은 화장품 회사를 택했다. 여직원들이 화장을 하지 않으면 시말서를 쓰는 회사였다. 예쁜 여자들이 많았다. 황홀했다. 직장 다닐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내가 내 돈 벌어서 먹고 싶은 술도 사 마시고, 밤늦게 놀기도 많이 놀았다. 그러나 업무량은 빡셌다.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 12시까지 일을 했다. 젊은 시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7, 8년간 근무하면서 항상 회사 대표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그래서 일 하는 게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내가 과연 이 회사의 오너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됐다. 당시에는 어려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믿고 따르던 회사 사장님, 창업주는 상당히 인덕도 넘치고, 지혜롭고 배울 게 많은 멘토였다. 그런데 사장님을 이을 후계자는 내 마음과 뜻이 안 맞아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내 사업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서게 됐다. 그렇게 미련 없이 사표를 던졌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모한 선택이었다. 그 때부터 내 인생은 고행길로 접어들었다. 그야말로 굴곡이 시작됐다.

  -처음 시작한 사업은 무엇인지.
  안 해본 게 없다. 사표를 내고 정말 3일 만에 후회했다. 어떤 사업을 펼치기에 나는 아는 게 없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직업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과일 장사였다. 남이 수확해 놓은 과일을 사다가 되파는 단순 노무. 충분한 계획 같은 것은 없었다. 부랴부랴 운전면허를 따고 부랴부랴 중고 화물차를 사고, 과일을 사러 가락시장을 헤맸다. 아파트 담벼락에서 동네 아줌마가 수박을 주문하면 배달해주는 일부터 했다. 그러다 과일을 배달만 하는 게 아니라 유흥가 업체에 납품하는 걸 생각했다. 순진했다. 그들만의 세계를 너무도 몰랐던 것이다. 유흥가를 상대로 하는 영업은 위험천만했다. 물건을 넘기고 나면 수금이 되지 않았다. 나와 납품 계약을 했던 조용필은 어느 새인가 사라져버리고, 가게의 주방장, 지배인도 모두 수시로 바뀌는 곳이었다.
  그렇게 과일 장사를 접었다. 가락시장에서 외상으로 샀던 과일값을 결제하느라 힘들게 샀던 조그마한 단독 주택을 팔수밖에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본격적인 실패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일어설 수 있는 나의 버팀목, 기둥이 될 수 것들을 스스로 하나씩 하나씩 잘라 내버린 결과를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미니슈퍼를 운영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아 정리하고 다음에는 액세서리 조립을 했다. 귀걸이, 팔찌, 목걸이를 조립하고 납땜질을 해댔다. 돈이 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다단계 사업도 해봤다. 청호나이스 정수기, 암웨이 영업까지 뛰었다. 그러다가 제과점을 열었다. 그런데 IMF가 터졌다. 건물주가 나가라고 해서 제과점도 비우게 됐다. 결국 나는 신용불량자의 나락에 떨어졌다.

  -연이은 실패로 힘들었겠다. 좌절의 순간 어떻게 극복했나.
가장 큰 좌절감을 느꼈을 때는 나를 직시하게 됐을 때다. 내가 참 못나 보였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이 모든 실패는 내 탓이었다. 마흔아홉. 신용불량자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제정신이 들었다. 막연하게 나는 잘 될 거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났다. 나를 스쳐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나은 사람들임을 깨닫게 됐다. 40대 중반까지 만해도 막연한 자신감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는 50대가 되어서야 주변이 보였다. 괜한 자존심으로 남을 비하하고 비아냥거리기만 했던 내가 변하기 시작했다. 굽힐 줄도 알게 되고,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이 저절로 나왔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멘토가 됐다. 그렇게 배움의 눈이 텄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진 게 아니라 세상의 눈을 새롭게 떴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세상을 달리 보니 인생을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이미 나이도 많이 찼고, 몸에 힘도 빠질 대로 빠지고, 정신도 피폐해졌다.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으니 지금부터 다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정말 최고로 만들어 보고 싶고, 내 인생을 다시 스스로 만들어 나가고 싶은 욕구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샌드위치는 어떻게 만들게 됐나.
  제과점을 했던 경력으로 우연한 기회에 샌드위치를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제빵 사업은 파리바게트, 샤니, 삼림, 크라운베이커리 등등 많은 대기업이 있다. 대기업에서 하지 않는 부분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 찾은 것이 샌드위치였다. 이왕 할 거면 일반적인 샌드위치가 아니라 외국인들도 즐겨 먹을 수 있는 고급 프리미엄 샌드위치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수없이 많은 점포를 찾아다니면서 없는 살림에 샌드위치만 엄청 먹었다. 샌드위치를 배우기 위해 책도 많이 보고, 잘 만드는 사람을 찾아 가르쳐달라고 엎드려 빌기도 했다.  그렇게 꾸준한 노력을 하다 보니 샌드위치라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혼자 시작했다. 빵 만들며 함께 일하던 친구들도 다 떠났다. 그러다가 아줌마 한 명 내지 두 명을 채용해서 내가 연구한 걸 아줌마더러 만들게 하고 만든 걸 새벽에 대학교 쪽에 납품을 하나씩 시작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맛있는 샌드위치였기에 매출은 꾸준히 늘었다.

 -이제 신용불량자 딱지도 뗐겠다.
  신 메뉴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든 거래를 중단한 적이 있다. 거래를 끊고 보니 입소문을 듣고서 이제는 여기저기서 먼저 러브콜이 왔다. 그 때 커피빈과 거래를 했는데, 커피빈 매장의 숫자가 많아 들어오는 액수도 상당했다. 결제금액 몇 천 만원이 통장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 있던 모든 빚을 한 번에 갚아버렸다. 신용불량자 딱지를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신용카드 하나 못 만드는 신세다. 체크카드를 쓰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한 번 되면 그 이력이 최소 5년 동안은 남기 때문에 은행에서 대출도 못 받고, 보증도 안 서준다. 그래서 자부한다. 우리 회사는 빚이 없는 건실한 회사다. (웃음)
 

 -인생의 실패와 성공의 요인이 있다면. 

  내가 실패했던 원인은 즉흥적이어서였다. 나는 오로지 젊음 하나만 믿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막연하게 다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만 갖고 내 인생을 스스로 낭떠러지로 떨어트렸다. 내 인생의 목표는 ‘무조건 사장이 되고 싶다’는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이런 뚜렷하지 못한 목표 아래 살다보니 어느 날 갑자기 사표를 내던지는 무모함을 감행한 것이다.
  첫째도, 둘째도 ‘디테일’이다. 구체적인 목표와 그에 따라 디테일한 계획 설정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도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모든 사업의 계획은 치밀하게 구상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시스템화 될 수 있게끔 아주 정밀하고 세밀하게 업무를 진행해나가야 한다. 그것만이 살아남는 길임을 수많은 고행의 길을 걷고 나서야 알게 됐다. 머릿속에 꿈은 있되,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세세한 계획이 없었던 나는 이 짧은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
  각국마다 맥도날드 빅맥이 얼마나 팔리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경제 지표가 파악되는 ‘맥도날드 지수’가 있다. 영속적인 나의 꿈은 ‘멜랑제 지수’를 만드는 것이다. 멜랑제라는 브랜드의 샌드위치가 세계 방방곡곡 나가기를 기대하고 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더라도 우리 멜랑제 샌드위치를 먹는 그 날을 만들 것이다. 글로벌화 된 전문 기업으로 키우고 싶다. 그렇다보니 납품만 할 게 아니라 점포화가 필요했다. 이제 직영 1호점 ‘멜랑제’ 샌드위치 카페가 오픈했다. 세계를 향해 나아갈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인생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인생의 목표와 자세한 계획을 필히 세울 것. 그리고 취업이 아닌 창업을 했으면 좋겠다. 차별화된 아이템과 열정만 있다면 서울에서는 못할 것이 없다. 왜 취업의 문만 두드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내가 맘만 먹으면, 열심히만 하면, 나만의 아이템만 있으면, 1인 창조 기업부터 해서 얼마든지 멋있는 내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다. 그러고 나서는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리겠다. “Stay hungy, Stay foolish.” 항상 내 꿈을 이루기 위해 갈구하고, 갈망해야한다. 또 어떻게 하면 내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해보면서 누군가 보기에 바보처럼 늘 고민해야 한다. 마치 내가 샌드위치 하나밖에 몰랐던 것처럼 말이다.

권예은 기자 silver122@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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