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에 울려퍼진 獨立萬歲의 喊聲!
탑골공원에 울려퍼진 獨立萬歲의 喊聲!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2.02.2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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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 울려퍼진 獨立萬歲의 喊聲!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19년 3월 1일! 참으로 자랑스러운 날이다. 지금으로부터 93년 전 이날,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는 각급학교 학생 및 시민 5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과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한편, 같은 시각 인사동(仁寺洞) 태화관(泰和館)에서는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이 대한민국의 독립을 내외에 선언한 기미독립선언(己未獨立宣言)이 있었다.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한용운(韓龍雲)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대표 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불길은 3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케 하노라. ‧ ‧ ‧”

 

이는 기미독립선언서의 일부이다. 이것은 우리 2천만 동포의 가슴 가슴에 맺혀 분연히 일어나게 한 절규였다. 2천만 동포의 한결같은 마음을 모은 이 부르짖음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새 문명의 열림을 알리는 우리 민족의 기개(氣槪)였다.

 

擧族的인 抗日運動의 불길이 일다

 

서울에서 기미독립선언이 있은 직후, 그 불길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이 날, 탑골공원을 출발한 시위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광교→시청 앞 →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 → 의주로→ 정동→ 미국영사관 →이화학당으로 해서 광화문으로 그 행렬을 이어갔다. 이들 시위군중은 이들을 제지하는 일본 군 ‧ 경을 물리치고, 민족의 피맺힌 통한(痛恨)을 절규했다.

이 날의 만세시위는 서울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평양 ‧ 의주 ‧ 선천 ‧ 안주 ‧ 원산 ‧ 진남포에서도 수많은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렸다. 그 다음 날에도 함흥 ‧ 수안 ‧ 황주 ‧ 중화 ‧ 강서 ‧ 대동 ‧ 해주 ‧ 개성 등 이북 전지역에 걸쳐서 만세시위는 불같이 일어났다. 이를 뒤이어 사리원 ‧ 송림 ‧ 곡산 ‧ 통천으로, 또 군산 ‧ 성천 ‧ 양덕 ‧ 용천 ‧ ‧ ‧,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갔다. 어린 여학생들도, 부엌에서 밥 짓던 아낙네들도, 거리의 상인들도, 상투를 튼 시골 노인들도 ‧ ‧ ‧, 상하 ‧ 귀천도 남녀 ‧ 노소의 구별이 없었다. 누구의 도움도 없었다. 우리 2천만 겨레의 하나된 절규였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국외의 동포사회에까지 확산되어 만주(滿洲) ‧ 연해주(沿海州) ‧ 미주(美洲) 등 우리 동포가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한 ‧ 일 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곳에는 우리 동포가 많이 이주하여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의병활동(義兵活動)을 하던 항일민족운동가들이 이 곳 만주로 자리를 옮겨와서 이주민(移住民)들에게 항일사상(抗日思想)을 고취시켰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3 ‧ 1 만세시위가 있은 후,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빨리 이 곳에서 적극적이고 전투적인 만세시위가 펼쳐졌던 것이다.

 

3월 6일, 서간도(西間島)의 환인현(桓仁縣)을 시발로 하여, 북간도(北間島)의 용정시(龍井市) ‧ 남만주의 삼원보(三源堡)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만세시위를 벌여 잃어버린 우리의 주권(主權)을 되찾고자 하였다. 하와이와 미주 본토에서도 국내에서 전개되는 독립운동상황을 재외한인(在外韓人)들에게 알리고, 만세시위를 펴나갔다.

한편, 국내의 기미독립운동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자 이 기사를 접한 미국의 교포들은 4월 14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독립관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고 독립선언을 하였는데, 이 독립선언은 세계의 큰 이목을 끌었다.

6월 16일에는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설립하고, 일제강점하(日帝强占下)에 있는 한국의 실상을 미국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지지를 얻어내고자 노력하였다.

3월 1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에서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주최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를 시작으로 하여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갔다.

 

世界의 獨立運動史에 길이 남아

 

일제(日帝)의 가증스러운 만행과 억압에 항거하는 우리 한민족의 독립만세소리는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로써 중국은 물론, 구미 각국에서도 한민족의 항일 애국심과 평화적 독립운동을 성원하고, 일본의 무력에 의한 탄압과 비인도적인 학살을 규탄하였다. 영국 ‧ 프랑스도 우리에게 우호적이었다.

이처럼 기미독립운동은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으며, 민중의 정치의식이 개화 ‧ 태동하여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민중운동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리고, 우리 후세들에게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긴 값진 교훈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 뿐이 아니다. 기미독립운동은 또 다른 값진 열매를 맺게 된다. 그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臨時政府)의 태동이다.

기미독립운동이 있은 직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서는 이동녕(李東寧) ‧ 이승만(李承晩) ‧ 김 구(金九) ‧ 이시영(李始榮) ‧ 김규식(金奎植)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1945년 8 ‧ 15 광복(光復)때까지 독립운동의 핵심적 주체로서 한국민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리고,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존속한 망명정부(亡命政府)로서의 소임을 다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국호(國號)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헌장(臨時憲章)을 제정하였다. 헌장은 나라의 기본법인 헌법(憲法)이라 할 수 있는데, 구절 구절마다 애국의 정신이 승화되어 있다.

 

“신인일치(神人一致) 중외협응(中外協應)하여 한성(漢城)에 의(義)를 기(起)한 이래 30유일간(三十有日間) 평화적 독립을 300여주(州)에 광복(光復)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恒久) 완전한 자주독립의 승리를 아(我) 자손 여민(黎民)에 세전(世傳)하기 위하여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이 얼마나 힘찬 외침이었던가. 우리 한민족의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우리 스스로도 놀라고, 일본도 놀라고 세계도 놀랐다. 아, 위대한 대한민국이여!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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