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보다 손이 부지런해야
머리보다 손이 부지런해야
  • 유헌식(교양기초교육원)교수
  • 승인 2012.03.13 19:52
  • 호수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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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필기도구와 노트도 없이 맥 놓고 앉아 있는 학생들이 종종 눈에 띈다. 눈과 귀만 수업에 참여할 뿐 손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필기 혹은 ‘쓴다’는 것은 단순한 ‘기록’ 이상이다. 필기는 단순히 수업의 흔적을 남기는 행위가 아니다. 쓰기는 현대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J. Derrida)도 언급했듯이 인간이 세계를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이다. 쓰기는 듣기나 말하기에 선행한다. 쓰기의 이러한 철학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쓰기는 학습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다.

쓰기를 통해 ‘머릿속 생각’이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쓰기는 ‘막연한 생각’을 ‘자기’와 구체적으로 연결시킨다. 교수가 말하는 내용은 그 자체로는 아직 ‘내 것’이 아니다. 수업내용뿐만이 아니다. 주변에 널려있는 모든 지식정보는 쓰기를 통해 정리되기 전까지는 아직 ‘나’와는 거의 무관한 ‘잡다(雜多)’에 지나지 않는다. 쓰기는 외부의 지식정보를 ‘나의 지식좌표’ 안에 자리매김하는 행위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지식 좌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좌표계 안에 외부의 지식정보를 ‘표시’하는 한에서만 그 정보는 나에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우리 대학 동문인 박원순 서울시장의 상의 가슴포켓에는 항상 볼펜이 꽂혀 있고, 어떤 자리에서건 그의 손에는 펜과 종이가 따라다닌다. 그의 이런 필기습관은 오래 전 학창시절에 길러진 것이다. 그의 학창시절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의 기억 속에는 그의 모나미 볼펜과 반듯한 필체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의 손을 떠나지 않았던 펜과 종이야말로 박원순 시장의 오늘을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나는 믿는다. 필기는 단순히 기억의 보조기능이 아니다. 기록은 성찰을 낳고 성찰은 새로운 생각을 낳는다. 그래서 머리보다 손이 부지런한 자가 앞서가기 마련이다.

대학교육의 본령은 기본적으로 학생 각자에게 그의 ‘자기’를 찾게 하는 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을 잘 할 수 있을지 학생과 교수가 같이 모색하는 과정에서 ‘쓰기’는 ‘자기 찾기’의 요체다. 부단히 적다보면 자기의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쓰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모든 게 모호한 채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말보다는 글이 실수를 덜 한다. 글은 필터링 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모호한지 쓰면서 알게 된다. 쓰기는 자기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어수선한 미로 속에서 수업내용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모습을 자기방식으로 필기 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점차적으로 ‘자기’를 구체화시킬 수 있다.

펜과 종이와 친하기를 적극 권한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모든 결과는 ‘쓰기’로 평가된다.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남길 수 없고 입증할 수 없다. 쓰기는 자기의 흔적이고 증명이다. 간단한 필기도구와 작은 노트는 항상 휴대하는 게 좋다. 강의실 안에서 뿐만 아니라 버스 안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혹은 잠자리에서 좋은 생각이 나면 바로 적는 습관을 기르자. 내 경우 영화관에서도 적는다. 자기만 알아보게 적으면 그만이다. 나중에 다시 정리하면 된다. 일상에서 적어 모은 쪼가리 글들이 자기를 성장시킨다. 순간의 귀찮니즘을 꾸준히 넘어서다 보면 어느새 자기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자기의 글이 자기를 만든다. 일단 ‘쓰기’부터 시작하자. 머리를 굴리기는 편하지만 손을 굴리기는 불편하다. 불편한 길이 진실에 가깝다. 손의 진실에 눈을 뜨자.

유헌식(교양기초교육원)교수
유헌식(교양기초교육원)교수

 yooriu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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