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載弼, 世界로 통하는 窓을 열다
徐載弼, 世界로 통하는 窓을 열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3.2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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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載弼, 世界로 통하는 窓을 열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4월 7일은 ‘신문의 날’이다.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1957년에 제정되었다.

1896년. 이 때 독립신문의 창간은 역사상으로, 또는 언론사상으로 볼 때 근대화의 횃불을 든 일대 쾌거였다.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을 위한’ 우리 글로 된 신문의 창간은 민권운동의 서막을 올린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크기의 4페이지 신문이었다. 그 가운데 3페이지는 한글전용으로 편집하였으며, 나머지 1페이지는 영문판(The Independent)으로 발행하였다. 이 때 영문판을 발행한 것은 우리나라의 실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창간호의 발매부수가 300부에 불과했는데, 곧 이어 500부로, 또 3,000부로 불어났다. 그리고, 창간 이듬해 1월 5일자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하여 2개의 신문으로 나누어 발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가 있었지만, 이는 순전히 한문으로만 기사를 썼으며 정부에서 발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독립신문은 민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게 한글전용으로 발행하였으니, 참으로 획기적인 시도였다.

 

民衆의 啓蒙과 나라의 自主獨立을 위해서

 

서재필(徐載弼)은 암울했던 시기에 독립신문을 창간, 이를 통해서 민권사상(民權思想) ‧ 평등주의(平等主義) ‧ 민족주의(民族主義)를 제창하면서 민중의 계몽과 사회의 발전에 앞장섰다. 그리고, 독립신문을 통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이끌어나갔다.

이것은 서재필의 오랜 숙원이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실패로 일본 ‧ 미국을 전전하면서 가슴에 담고 있었던 나라의 자주독립과 민중의 계몽을 실천에 옮기려는 그의 의지의 표출이었다.

1896년 4월 7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 창간호가 태어난 것이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간행사에서 “오늘 독립신문을 처음으로 출판함에 있어서 조선(朝鮮)에 있는 내외국(內外國) 인민들에게 미리 우리들의 주의(主義)를 알리고자 한다. 우리는 첫째 편벽(偏僻)되지 아니할 것이다. ‧ ‧ ‧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여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것이다. ‧ ‧ ‧ 정부에서 하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것이요, 백성의 정세(情勢)를 정부에 전할 것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의 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가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알면 피차 유익한 점이 많을 것이요, 불평하는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어서 獨立協會를 설립하다


그런데, 서재필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7월 2일 이상재(李商在) ‧ 이승만(李承晩) ‧ 윤치호(尹致昊) ‧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립을 표방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설립하였다. “나는 신문만으로는 대중에게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개혁사상을 고취하기가 곤란할 듯 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무슨 정치적 당파를 하나 조직하여 여러 사람의 힘으로 그 사상을 널리 전파시켜야겠다고 생각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한지 7,8삭(朔) 후에 우리 집에서 비로소 「독립협회」(獨立協會)라는 것을 창설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이것이 독립협회 설립의 변이다.

이러한 설립취지에 따라 독립협회는, 초기에는 토론회 ‧ 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썼으나 차츰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정부의 외국의존정책을 비판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더 나아가, 비리(非理)에 물들어 있는 고급관리의 숙청투쟁에도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에 앞장 설 지도자를 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로써 독립협회는 독립신문과 더불어 근대적인 자주국가의 수립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쌓아갔다.

독립협회는 연설을 통해서, 때로는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서 정부의 외국인 고문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였으며, 금광채굴권과 산림채벌권 및 철도부설권이 외국인에게 허용되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혈기에 찬 소장회원들은 이를 황제(皇帝)에게 상주(上奏)하였다.

1897년 8월 29일부터 독립협회는 매주 일요일 정기적인 토론회를 개최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율적인 근대화를 추진해나갔다. 이를 위해 1898년 3월 10일에는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민중적 자주국권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使臣)을 위해 잔치를 베풀던 모화관(慕華館)을 개축하여 ‘독립관’(獨立館)으로 개칭하고, 여기서 토론회 ‧ 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독립사상을 고취해나갔다.

그리고, 독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독립문은 1896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착공한 지 만 1년만인 1897년 11월 20일에 준공되었는데, 이는 파리(Paris)의 개선문(凱旋門)을 모델로 하였다고 한다.


서재필. 그는 세계정세에 눈을 뜬 선지자(先知者)였으며, 우리의 구태의연한 생활방식을 일신하려는 선각자(先覺者)였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독립신문은 암울했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앞날을 열어가는 한 줄기 불빛이었다. 그것은 우매한 민중들에게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창이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그 실천의 장(場)이었으며, 독립문은 그 상징었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수구파(守舊派)의 미움을 사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그의 사랑하는 조국의 땅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고 튼실한 열매를 맺어갔다. 그렇다. 일반대중들로 하여금 봉건적 잔재를 벗어던지게 하고, 개화(開化)의 눈을 뜨게 한 씨앗이 아니었던가. 그의 선지자적 생각, 그 실천! 참으로 아름답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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