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면 손에도 눈에도 꿈이 영근다
새벽이면 손에도 눈에도 꿈이 영근다
  • 이영은·김예은 기자
  • 승인 2012.03.28 13:38
  • 호수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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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로 졸음을 이기고 춤도 춰 보고 정 안되면 쪽잠을 청한다

 

        새벽이면 손에도 눈에도 꿈이 영근다

 

▲ 마우스 클릭소리가 가득찬 시각디자인과 작업실

 

우리 대학 시각디자인과 작업실. 무릎엔 개교기념일 기념 담요를, 책상에는 커피를 가득 담은 컵을 올려두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밤새 작업하는 학생들. 테두리 가에 붙어있는 책상에는 우리 대학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이, 가운데 책상에는 우리 대학을 비롯한 홍대, 건국대에서 모인 학생들이 공모전 포스터 회의를 하고 있다. 회의하는 목소리 외에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새벽 1시가 되자 포스터 팀은 야식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그들이 나가고 30분쯤 흘렀을까. 경비아저씨가 새벽에 남아있는 학생들의 명단을 적으러 내려왔다. 3월은 과제나 공모전이 많은 시즌이 아님에도 새벽 작업실에는 12명의 학생이 남아있다. 박다롱(시각디자인·3)양은 “과제 시즌인 기말고사 말쯤에는 폐인 생활하는 제대로 된 ‘인간극장’을 볼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 한 학생이 인디자인으로 작업하고 있다.

 

시각디자인과는 전공 특성상 중간·기말 시험이 없는 과목이 많다. 대신 매주 과목마다 한 두 개씩 과제를 줘서 매일 매일이 시험인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별과제는 한 학기에 한 두 개씩으로 타과보다 적은 편이다. “과제도 있고 과 특성을 살린 아르바이트도, 오늘같이 대학끼리 연합해서 하는 전시회도 있고… 동시에 진행하는 작업이 많아 야작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마우스와 키보드 위에 놓인 박 양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수원에 사는 박 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는 들어오라는 아버지의 엄포 때문에 1·2학년 때는 매일 집에 들어갔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남아 새벽 작업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아졌다. 지금은 2~3일에 한번 씩 집에 들어가는 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학원 값에, 대학에 들어와서도 기기 값, 재료값, 등록금까지. 박 양은 “예체능 쪽은 엄마 등골 빨아먹는 일”이라며 “1학년 때는 수작업이여서 재료값이 많이 들고, 고학번이 될수록 컴퓨터 작업이 많아 프린트비가 많이 든다”고 말했다. 일주일 3-4개의 과제들을 A1 사이즈부터 카드같이 작은 사이즈까지 컬러로 뽑으면 거의 5만원 이상이 든다.

따로 수면실이 없어 야작을 마친 후에는 가운데 있는 책상 위에 올라가 침낭을 깔고 잔다. 박 양은 “침낭이나 책상 위에 자리가 남아있다면 운이 좋은 날”이라며 “처음에는 허리가 아팠지만 익숙해졌다. 그게 아니면 그냥 책상에 엎드려서 잔다”고 말했다. “밤에 일이 잘 되요. 낮에는 졸리니깐.” 말한 박 양은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전 7시가 되서야 잠에 들었다. 아니 잠이 들었다기보다는 기절이다.

 

레드불로 졸음을 이기고 춤도 춰보고 정 안되면 쪽잠을 청한다

 

오후 11시. 활기찬 낮과는 달리 고요해진 천안캠퍼스. 어느새 어둑해진 그 곳에서 빛을 내고 있는 예대 건물로 향했다. 야간작업으로 유명한 예대답게 실기실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색색의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맨 몇몇 학생들을 보자 예대에 온 것이 실감났다.

예대에서도 가장 많은 밤샘작업이 이루어진다는 4학년 실기실을 찾았다. 많은 학생들이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며 작업에 한창이었다. 각자 자기 그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사뭇 비장해보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때마침 화장실에 가려던 한 학생과 마주쳤다. 간단하디 간단한 그 한마디가 무척 반가웠다. 기사에 대해 설명하고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냐고 묻자 “아마 오늘 취재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내일 작품 평가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좀 예민해져 있다는 것이다.

▲ 고주안(서양화·4)군이 작품에 덧칠하고 있다.

 

기자가 찾아간 서양화과의 경우 별도의 시험 없이 모든 평가가 실기로 이루어진다. 한 학기에 900호(100호는 큰 문짝 하나 크기)를 완성하면 되는데, 중간고사까지 두 작품을 끝내야 한다. 매 강의마다 별도 과제도 주어진다.
졸업을 앞둔 4학년은 더 심하다. 과제전, 동아리전, 졸업전시전 등 5~6개의 전시까지 준비해야 한다. 매일같이 밤샘작업이 이어지고, 1교시 수업 전까지 한 숨도 못 자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야말로 쉴 틈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한 학생이 자신은 여유가 있다며 실기실 한켠으로 안내했다. 한 실기실은 15명 정도가 함께 사용하는데 공평성을 위해 학기 초에 제비뽑기로 자리를 정한다고 했다. 고주안(서양화·4)군의 자리는 다른 사람들 자리보다 넓어 보였다. 원래는 복도였던 자리를 개조했기 때문이란다.


고 군의 자리에는 현재 작업 중인 작품부터 물감, 옷, 치약과 칫솔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이 있었다. ‘예대생들은 예대에서 산다’는 말이 실감났다. 고 군에게 이 말을 전하니 “실제로 바닥에 돗자리 깔고 담요 덮고 자는 애들도 있다”며 웃는다. 야간작업을 하다 보면 야식도 자주 먹는다며 “학교 근처 음식점은 저희가 다 먹여 살릴 걸요.”라고 너스레를 떤다.


힘든 점은 없냐고 물으니 곧바로 “재료값이 너무 비싸다”는 답이 돌아온다. 고 군의 경우 한 달에 물감값만 2,30만 원이 든다. 거기에 100호짜리 합판은 제일 싼 게 3,4만 원이다. 합판의 종류로는 와쿠와 판넬이 있는데, 와쿠가 5만 원 이상 더 비싸다. 가격 때문에라도 세밀한 작업에 좋은 와쿠보다 거친 느낌이 강한 판넬을 자주 사용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니 비싼 재료값을 어떻게 감당할 런지 엄두가 안 났다. 기자가 만나본 예대 학생들은 대부분 부모님께 죄송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재료비를 보태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을까. 고 군은 “한 번은 친구가 마술 동작을 보여줬는데 뜻하지 않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처럼 영화를 보거나 놀러갔을 때 등 일상생활 속에서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럴 때는 휴대전화에 적어두거나 바로 학교로 돌아온다.


"신기하죠? 제가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큰 합판에 한지를 붙여본 적이 없었어요. 이게 정말 신기해서 아는 사람마다 다 자랑하고 다녔다니까요.”

 

▲ 이혜윤(동양화·3)양이 한지에 물을 뿌리고 있다.

3학년 실기실에 들어서자 이혜윤(동양화과·3)양이 합판에 한지를 붙이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기자가 신기해 하니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의자 두 개에 합판을 올리고 그 위에 한지를 놓는다. 풀로 모서리를 붙이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기 시작한다. 물을 먹어 합판에 달라붙은 한지를 그대로 건조시키면 완성이다. 물 먹은 한지는 굉장히 무거워 저렴한 합판을 썼더니 합판이 휘어진 적도 있었단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대생의 로망은 환상뿐인 걸까. 이 양은 아니라고 말했다. 이 양은 “예대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특이해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시트콤처럼 재밌다”고 말한다. 날씨가 좋으면 예대 앞마당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생활음악과 학생들이 기타 등 악기를 가지고 나와 연습하고, 앞치마 입은 미대생들이 구경하는 식이다. 축제 때도 예대에서 따로 클럽을 열지 않아도 밤이 되면 예대 주점 앞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클럽처럼 변한다.

예대 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 거의 다 자취나 기숙사를 선택한다. 그래도 자취방이나 기숙사보다 예대 실기실이 더 친숙하다. 작업을 하다 졸리면 레드불로 졸음을 이기고, 정 안되겠으면 쪽잠을 청한다. 과제가 밀리고 마감이 있는 시험기간은 추리닝 차림에 온종일 학교에서 산다. 이런 생활을 어떻게 견딜까 자못 신기하다.

“새벽의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은 작업이 잘 안 풀릴 때는 노래를 크게 튼 채 실기실 불을 끄고 핸드폰 조명 아래서  다 같이 춤을 춘다. 같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서 작업을 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단다. 작업이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으니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견딜 수 있다.

새벽 두시 반. 취재는 정리가 됐지만 그들의 작업은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물감으로 엉망인 앞치마에 추리닝을 입고 집중하고 있는 그들이 어쩐지 반짝반짝 빛나 보인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자신의 꿈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이 멋져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예대 작업실, 오늘도 그 곳엔 청춘이 있다.

 이영은·김예은 기자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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