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오도답파여행 24. 대구의 청년이여, 실업으로 분발하라
新오도답파여행 24. 대구의 청년이여, 실업으로 분발하라
  • 김재관(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2.03.29 00:39
  • 호수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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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청년들에게 외치는 공허한 울림
▲ 대구의 대표적인 상인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목의 고택.

이광수는 동래, 해운대, 부산을 둘러보고 마산을 거쳐 대구로 향한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목포를 출발하여 남해안의 도시들을 차례로 찾아보고, 부산을 거쳐 대구로 갈 계획이었다. 만약 목포에서 앓아눕지 않았고 ‘탐량단’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그는 바다와 접한 남해안의 해안도시를 따라 가는 여정을 이어갔을 것이다.


매일신보사의 일정 때문에 마산을 건너뛰고 부산으로 직행했지만, 「오도답파여행」의 기획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신흥도시 마산으로 회귀한다. 마산에서 취재를 마친 그는 마산선과 경부선이 이어지는 삼랑진역에서 북행하는 열차를 갈아탄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 연재를 끝낸 장편소설 『무정』의 주요 공간이었던 ‘삼랑진’을 지날 때, 그는 가난하고 무지한 조선인들을 위해 선진학문을 배우자고 외치던 ‘이형식’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인지 ‘대구’ 여행의 소감은 문명과 야만의 비교 서술로 시작된다. 일제에 의하여 도입된 통신, 전화, 도로, 마차, 상수도, 하수도, 병원, 은행, 금융조합 등은 문명의 표상으로 제시하고, 쓰러져 가는 초가집, 파리가 날아드는 음식점, 불결한 도로 등은 야만의 결과물로 거론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대구의 조선인들(舊大邱의 人民)은 문명화를 추진하려는 능력을 갖추려는 의지도 없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인다. 대구 사람들에 대한 그의 비판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일 년 전 『매일신보』에 게재했던 「대구에서」에서 ‘대구의 청년들을 지식이 암매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이 옛날 생각(引舊夢)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일 년 후 다시 찾은 대구에서도 비판의 강도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당시 그는 오산학교 교원을 그만 두고 러시아와 중국을 방랑하다 돌아와 일본에서 2차 유학 중이었다. 일본에서 학업을 수행하면서도 그는 『매일신보』의 지면을 통하여 식민지 조선의 문명론을 펼치고 있었다. 경성일보사의 사장이었던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매일신보』에 연재되던 이광수의 문명론은 일제의 식민지지배정책과 공통점이 많았다. 아베는 그를 『매일신보』의 주요 필자로 등용하여 일제식민지배의 타당성을 선전하고자 했다. 「대구에서」는 경성에서 아베를 만나고 대구를 찾은 이광수가 그의 바람에 호응하는 글이기도 했다.     


문명화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의 언술은 「오도답파여행」의 ‘대구 편’에서도 이어진다. 이미 「대구에서」에서 일제의 조선인 차별 구조를 묵인했던 그는 이 글에서 일제의 폭력적인 지배 방식을 공인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憲兵隊의 多數한 警官들은 社會의 秩序를 維持하여 府民의 生命과 財産을 保護하는 警察機關이요. 巍    한 府廳의 眼眸 烱烱한 吏員들은 市의 發達을 爲하여 苦心焦慮하는 府의 行政機關이다”라는 서술을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 서술에서 나타나는 의례적인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앞서 찾았던 지역에서 그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을 들은 바대로만 적었다. 그런데 ‘대구 편’에서 그는 일제의 지배 정책을 상찬하는 지경에 이른다.  


일 년 전 발생한 조선 청년들의 강도사건을 ‘일본에서 신교육을 받고 와서도 관리가 될 수 없는 자들의 저지른 불만을 품고 저지른 소행’으로 규정했던 그는 다시 대구를 찾은 자리에서 ‘청년들이 실업계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렇지만 그의 말처럼 “일본인의 손에 전반사회의 주권이 들어간” 상황에서 조선의 청년들이 상공업에 뛰어 들었다 하더라도 매판(買辦)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을 도외시한 채 대구 청년들에게 실업의 중심이 되라는 그의 말이 공허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게다가 ‘일제의 지배 이후 문물이 발달했음에도 조선 사람이 더욱 가난해지고 있는 이유를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조선인’ 때문이라고 탓하는 상황에 이르면 그가 식민지 조선의 다섯 개 도를 여행하면서 무엇을 보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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