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오도답파여행 25. 보통교육, 교육입국을 위한 기반
新오도답파여행 25. 보통교육, 교육입국을 위한 기반
  • 김재관(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 승인 2012.04.04 12:28
  • 호수 13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구 청년들이여 新대구의 주역으로 나서라
▲ 1898년 '해성학교'의 전신인 '해성재'가 있었던 대구 게산성당.

1898년 천주교 대구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프랑스인 Achille Paul Robert(한국명 김보록)은 계산성당 내에 ‘해성재(海星齋)’라는 한문서당을 개설하였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교육시설이었던 ‘해성재’는 1908년 외부 환경의 변화로 사립교육기관으로 바뀌게 된다. 일제통감부가 제정한 ‘사립학교령’으로 인하여 ‘해성재’를 기존 방식대로 운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는 계산성당 교육관 내에 있던 ‘해성재’를 ‘성립학교(聖立學校)’로 이름을 바꾸고, 사립보통학교로 규모를 확대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사립학교 정책이 강화되면서 ‘성립학교’는 ‘해성학교(海星學校)’로 다시 바뀐다. 조선을 병합한 일제는 ‘조선교육령’을 제정하고, 사립학교를 식민지 공교육 체제로 흡수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선교육령과 세부시행규칙을 제정했는데, 그 중의 하나인 사립학교 규칙은 학교교육에서 성서 교육과 예배를 금지하게 했다. 이에 따라 종교 재단이 설립한 사립학교는 학교를 폐쇄하던지, 또는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을 수용하여 학교의 명맥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양자택일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해성학교’의 출범은 일제의 사립학교 규칙 때문에 종교학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던 ‘성립학교’가 생존하기 위한 고육책의 결과였다. 천주교 대구본당은 가톨릭 신자이자, 당시 대구의 재산가였던 ‘김찬수(金燦洙)’에게 매년 일만원씩 5년간 출연하는 조건으로 학교의 운영권을 넘긴다. 학교를 인수한 ‘김찬수’는 자신의 재산을 출연하여 새로운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교무(校務)를 전담하는 등 ‘해성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광수가 이 학교를 찾은 때는 ‘해성학교’로 새롭게 출범한지 두 해 남짓 된 시점이었다.

 그는 오·육백 석의 재산으로 매년 일만원을 내어 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김찬수’에게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내부의 장식도 꽤 정돈되고 탁자 의자까지도 가옥과 잘 조화가 된다. 따라서 교주의 착실한 사상을 가히 알 수 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김찬수’의 학교운영은 열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후, 낙동강 홍수로 자신 소유의 전답이 수해피해를 입어 경제적 타격을 받은 ‘김찬수’는 학교운영을 포기하고, ‘해성학교’의 운영권을 ‘천주교우회’에 넘긴다. 비록 5년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공립보통학교가 두 개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립보통학교를 운영했던 ‘김찬수’는 근대 대구교육의 선각자로 칭송받을만한 인물이다. ‘김찬수’는 대부분의 대구 재산가들이 가뭄피해로 인한 수입 격감만 한탄하고 있던 것고 달리,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의 교육발전을 위하여 매진했을 정도로 대구의 근대교육을 선도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비하여 대구의 조선인 재산가들은 근대교육에 관심이 없었다. 이광수는 ‘원래 부읍(富邑)으로 유명한 대구에서 인물이 많이 나지 못하였으나, 부자는 많이 났소’라는 대구사람들의 자랑에 ‘인물은 다른 지방에서 나라’하고, ‘대구에선 거부(巨富)만 내어라’라며 대꾸한다. 또한 그들의 자식들도 ‘조상의 해골이나 울려먹는 양반’에 불과하다며 비난한다. 자라나는 청년 중에서 인물이 나와야 하는데, 대구의 청년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둑과 도박 놀음으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는 이들이 문명발전의 주역으로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를 장유(長幼)의 질서에서 찾았다. ‘노인들이 도량(跳梁)하고 청년들이 칩복(蟄伏)’하는 대구의 현실을 비판하고, 청년들이 ‘신대구(新大邱)’의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민족자본이 쇠퇴한 대구에서 조선인이 새로운 산업의 주역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광수는 융성했던 대구의 상업이 쇠퇴한 이유를 대구의 재산가들이 대구를 발전시켜야 하는 책무를 방기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다시 대구가 조선의 중심상업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재산가들이 보통학교를 설립해서 청년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할 때 대구의 거부였던 ‘서상돈(徐相敦)’과 같은 인물이 대구의 청년 속에서 다시 나올 수 있다고 강조하고 대구를 떠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