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4.0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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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나라의 명운(命運)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았다. 때는 1636년 12월 9일, 청(淸) 나라 태종(太宗)이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朝鮮)을 침략해왔는데, 이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고 이름한다.

이 난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자는 청 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청 나라가 압록강을 건너 우리나라를 쳐들어온 불법침략이었다. 이에 인조대왕(仁祖大王)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신하를 거느리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란하였지만, 12월 16일 청 나라 선봉군(先鋒軍)이 이 곳을 포위하고 말았다.

 

이 지경을 당하고 보니 군신간(君臣間)에 얼굴을 맞대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한 가랑이에 두 다리 넣는다”는 우리의 속담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엄동설한에 날씨는 춥고 양식은 떨어지고 ‧ ‧ ‧. 이를 두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하던가.

 

어디 그 뿐이었던가. 급박한 전황(戰況) 중에 성내(城內)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화파(主和派)는 청 나라와 화친해야 한다고 하고, 김상헌(金尙憲) 등의 척화파(斥和派)는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조정(朝廷) 대신(大臣)들의 논쟁이 거듭되면서, 인조 임금은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쩌면 좋은가. ‧ ‧ ‧ 고금(古今) 천하에 이렇게 망극한 일이 또 있을까”를 되내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受降檀에서의 屈辱을 어찌할고

 

그러나, 시간은 그들을 위해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암담한 가운데 해가 바뀌어 1637년 정축년(丁丑年)이 밝았다. 그래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군사들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점점 싸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인조 임금은 하는 수 없이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인조 임금의 굴욕적인 항복례(降伏禮). 1637년 1월 30일, 인조 임금은 세자(世子) 등 5백여명의 호행(扈行)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삼배고두(三拜叩頭)로 청 나라에 대한 신례(臣禮)를 맺고 말았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2월 15일, 청 태종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척화파인 홍익한(洪翼漢) ‧ 윤 집(尹集) ‧ 오달제(吳達濟) 등 3학사(三學士)를 인질(人質)로 삼았다. 청 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여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1645년 환국(還國)하였으나, 애꿋게 적국(敵國)에 끌러갔던 3학사는 심양(瀋陽)에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3학사의 한 사람인 홍익한의 애절한 심정이 나의 가슴을 아리게 적신다.

 

“수양산(首陽山) 나린 물이 이제(夷齊)에 원루(寃淚)되야

주야불식(晝夜不息)하고 여흘 여흘 우는 뜻은

지금에 위국충성(爲國忠誠)을 못내 슬허하노라”

 

2007년 7월 어느 날, 나는 제자 몇 사람과 남한산성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해 6월 한 ‧ 중 ‧ 일 국제학술대회에서 “法을 통한 日本의 韓國植民支配”(학술대회 대주제 : 法을 통한 植民支配)를 발표하면서 우리나라가 5천년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외침(外侵)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던 바 있었는데, 이 외침의 아품을 되새기면서 그 현장의 하나인 이 산성을 찾았던 것이다.

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때 굴욕적인 ‘신례(臣禮)의 맹약’을 했던 옛 싸움터(史蹟 제57호)이다. 그 때, 이 산성을 둘러보면서 참으로 많은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大淸皇帝功德碑’. 우리 한민족의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의 흔적이 아닐 수 없다. 이 비석 옆에 세워져 있는 부조(浮彫)의 글귀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유구한 우리 겨레의 역사에는 만고에 길이 빛날 조상의 위업도 많고, 자랑스러운 선현의 발자취도 흔하거늘 어찌 여기 삼전도의 욕된 비석의 옆자리에 부조를 세워 무엇을 기리고자 함인가?

‧ ‧ ‧ 중 략 ‧ ‧ ‧

우리 겨레는 민족사적 정통성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오욕의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민족적 자존을 드높이고, 자주 ‧ 자강의 의지를 굳게 다져야 할 것이다.”

 

이 부조의 글귀는 우리 모두가 가슴에 새겨두어야 할 ‘삼전도의 수난(受難)’의 역사이다. 이는 청 나라의 10만 대군(大軍)의 총부리 앞에서 조정(朝廷)이 주화냐 척화냐로 갈라져서 정책의 혼선을 빚은 결과였다.

 

政派 떠나 나라 위하는 政治人 많았으면

 

지금, 나라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북한 김정은 3대 세습체제(世襲體制)가 어디로 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4월 국회의원 총선거와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금의 우리 정치판을 보면 어지럽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3백여년 전의 남한산성의 형국을 떠올리게 됨은 나만의 안타까움때문일까.

정치판은 이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면서 좌와 우,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져서 피흘릴 각오로 진영을 가다듬고 있다. 친이(親李) ‧ 친박(親朴)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 뿐이 아니다. 요즈음 새누리당에서는 ‘변화와 쇄신’을 다짐하면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4 ‧ 11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마무리했지만 당내의 곳곳에서 파열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야당은 또 어떤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4 ‧ 11 국회의원 선거 후보단일화 경선을 둘러싸고 뒷끝이 시끌시끌하다. ‘서울 관악 을(乙)’이 그 대표격이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가 후보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 조작의혹에 휩싸인 탓이었다(문화일보 2012. 3. 23, 1면). 뿐만이 아니었다. 후보사퇴 압력을 받으면서 머뭇거리는 동안 유권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던가.

요즈음 정치판을 보고 있노라면, 여(與)든 야(野)든 자기 몫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더욱이,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과열 ‧ 혼탁으로 치닫고 있다는 염려를 자아내고 있다. 허위사실 공표, 후보자 비방 등 흑색선전이 지난 2008년 선거때보다 4배를 웃돌고 있다니(문화일보 2012. 3. 19 「사설」), 더 할 말이 없다.

그 뿐이 아니다. 지역구 후보 927명 가운데 지난 5년간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은 후보가 23명이나 되고, 104명은 최근 5년간 세금을 체납한 전력(前歷)이 있다고 한다(2012. 3. 26. 조선일보 「사설」).

‘나보다 소속 정당을, 당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인’을 보고 싶다.

 

문득 영국의 작가 스몰레트(Smollett, T. G. : 1721 ~ 1771)가 남긴 명언이 떠오른다. “진정한 애국심(愛國心)에는 당파(黨派)가 없다.” 4월 총선과 12월 대선을 준비하는 정치인 모두가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귀한 말이다.

강우규(姜宇奎 : 1855 ~ 1920) 의사(義士)가 일제(日帝)에 의해 처형 당하면서 남긴 피맺힌 절규(絶叫)를 여기에 옮기면서 이 글을 맺는다. “단두대(斷頭臺)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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