紅衣의 의병장, 郭再祐
紅衣의 의병장, 郭再祐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4.10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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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衣의 의병장, 郭再祐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우리나라는 5천년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외침(外侵)을 받아왔다. 일본에 의한 삼포왜란(三浦倭亂) ‧ 을묘왜란(乙卯倭亂) ‧ 임진왜란(壬辰倭亂) ‧ 정유재란(丁酉再亂), 중국에 의한 정묘호란(丁卯胡亂) ‧ 병자호란(丙子胡亂) 등이 그것이다.

 

文弱에 흐르고 黨爭에 빠지고

 

1590년(朝鮮 宣祖 23년),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일본에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를 접견하고 귀국하여 왕에게 적정(敵情)을 보고할 때 서로 다르게 보고한다. 이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황윤길은 “장차 일본이 반드시 내침(來侵)할 것이니,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복명하였다. 이 때, 김성일의 보고는 이와 상반된 것이었다. “신(臣)은 그 곳에 그러한 징조(徵兆)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 ‧ ‧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때 조정(朝廷)은 동인(東人) 세력이 우세하였으므로, 서인(西人)인 황윤길의 의견이 묵살되었다. 당시에는 이미 당쟁(黨爭)의 뿌리가 깊이 내리고 있었던 때라서 이같은 갈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윤길 ‧ 김성일 두 중신(重臣)의 엇갈린 보고를 머리에 떠올리면서, 문득 로마의 군사전문가 베게티우스(Vegetius, F. V. R.)의 명언이 나의 귀에 귀하게 다가온다. “평화(平和)를 원하거든 전쟁(戰爭)을 준비하라.”

 

1592년 4월 13일, 황윤길의 예견대로 도요토미가 육군 15만명과 수군 8천명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침략해왔다. 왜군(倭軍)은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큰 저항없이 궤멸시켰으며, 이튿날 부산(釜山)을 빼앗고 이어서 동래(東萊)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동(東) ‧ 중(中) ‧ 서(西)의 세 길로 나누어 김해(金海) ‧ 양산(梁山) ‧ 밀양(密陽) ‧ 대구(大邱)를 거쳐 서울로 북상(北上)하였으나, 지방관(地方官)들은 싸워보기는 커녕 겁을 먹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관군(官軍)도 일본의 신무기(新武器) 조총(鳥銃)의 위력에 힘없이 무너졌다.

한편, 선조(宣祖) 임금은 난을 피하여 개성(開城) ‧ 평양(平壤)을 거쳐 의주(義州)로 몽진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백성들이 스스로 향토의 방위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이것이 우리나라 의병(義兵)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이, 경상도(慶尙道) 의령(宜寧)에서 곽재우(郭再祐)가 1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낙동강(洛東江)을 따라 왕래하면서 왜군을 무찔렀다.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털어서 의병들을 배불리 먹이고 입혔다. 그리고, 그들 의 가족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곽재우의 후덕함에 감동되어 많은 장사들이 그의 휘하에 몰려들었다.

곽재우는 늘어나는 의병들을 통솔하기 위해 편제를 정비하고, 각급 지휘관을 임명하여 정규군(正規軍) 못지 않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때, 곽재우가 붉은 옷(紅衣)을 입고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웠으므로, 그를 가리켜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호탕한 性品의 熱血靑年

 

곽재우! 그는 1552년 8월 28일 그의 외가(外家)인 경상도 의령현(宜寧縣) 세간리(世干里)에서 황해감사(黃海監司) 곽 월(郭越)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두 눈에 광채가 있었으며, 호탕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주 총명하여 주위 어른들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고 한다.

곽재우는 여덟 살 되던 해부터 동네 앞 용연암(龍淵岩)이라는 바위 위에 세워진 용연정(龍淵亭)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며, 열여섯 살때부터는 남명(南冥) 조 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 때 남명의 사랑을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그는 1585년, 34세가 되던 해에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였으나, ‘답안의 내용이 임금의 뜻을 거슬렀다’ 하여 불합격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그는 이런 일이 있은 후에는 과거를 멀리하고, 오직 고향에서 자연을 벗하여 풍류를 즐겼다.

 

그러던 그가 마흔 한 살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때 의병을 일으켜 맹활약했지만 감찰사(監察使) 김 수(金晬)의 모함을 받고 구금되었는데, 경상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장계(狀啓)로 죄 없음으로 밝혀져 석방되었다. 그 후, 유곡찰방(幽谷察訪) ‧ 성주목사(星州牧使) 등의 벼슬을 하면서 왜적을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다가 당쟁(黨爭)으로 나라가 어질러짐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경상도 비슬산(毖瑟山)에 들어가 낙동강변의 창암(蒼岩)에 정자를 짓고 은둔했다. 그 정자를 ‘망우정’(忘憂亭)이라 이름하고, 자연을 벗삼아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지만, 건강이 좋지 않음을 핑계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 그의 심정을 노래한 시(詩) 한 수가 전한다.

 

“아래는 장강(長江)이요 위에는 산인데

망우정(忘憂亭)은 그 사이에 있구나

망우선자(忘憂仙子)는 걱정을 잊고 누웠으니

밝은 달 맑은 바람을 벗하여 한가롭네”

 

곽재우. 그는 나라를 지키는 참 군인이었다.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는 온 몸으로 나라를 지켰다. 그리고, 물러설 때를 알고 물러섰다.

화왕산성을 지키면서 부하 장병들에게 한 그의 말 한 마디가 나의 가슴을 적신다.

 

“만일 이 산성을 지킬 수 없을 때는 여기에 불을 질러 우리는 다같이 타 죽고 말 것을 각오하라!”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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