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과 패기,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젊음과 패기,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4.17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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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과 패기,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오는 19일은 4 ‧ 19 학생혁명 52주년이 되는 날이다. 1960년 2월 28일 대구(大邱) 학생시위, 3월 15일 정 ‧ 부통령 선거부정, 마산시민(馬山市民) 부정선거 규탄, 4월 18일 정치폭력배에 의한 고대생(高大生) 피습사건, 4월 19일 학생 ‧ 시민 총궐기, 4월 25일 교수단(敎授團) 데모, 4월 26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하야(下野)로 이어지는 4 ‧ 19 학생혁명!

 

3 ‧ 15 不正選擧, 4 ‧ 19革命을 촉발하다

 

1960년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장 면(張勉)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대구 유세(遊說)가 있는 날 학생들의 참석을 막기 위한 일요일 등교지시에 불만을 품은 고교생들의 거리시위가 시작됐다. 경북(慶北) 고등학교 학생 800여명을 선두로 하여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것이 4 ‧ 19 학생혁명의 도화선(導火線)이 되었다.

자유당(自由黨)은 권력과 금력,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정 ‧ 부통령에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이 당선되도록 부정선거(不正選擧)를 획책하였다. 4할 사전투표, 3인조 ‧ 9인조 공개투표, 유령유권자 조작 및 기권자 대리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이에 젊은 학생들이 분노했다. 12년간 계속되어온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와 실정(失政)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외침이 4 ‧ 19 학생혁명으로 이어졌다. 부패한 권력의 말로(末路)!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다음은 조지훈(趙芝薰) 님의 시(詩) ‘진혼가(鎭魂歌)’의 일부이다.

 

“가슴에 치솟는 불길을 터뜨리니

사무친 그 외침이 강산을 흔들었다.

선혈(鮮血)을 뿌리며 우리 싸워 이긴 것

아! 민주혁명의 깃발이 여기 있다.

가시밭을 헤쳐서 우리 세운 제단(祭壇)앞에

울며 바친 희생들아 거룩한 이름아!”

 

‘수호예찬의 비(碑)’에 새겨진 ‘진혼가’가 나의 발걸음을 멈춘다. 어디 그 뿐인가. ‘4월 학생혁명기념탑’의 짧은 글귀도 나의 가슴에 아리게 와닿는다.

 

“1960년 4월 19일.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 ‧ ‧”

 

敵都에서 펼친 젊은이의 氣槪

 

우리 젊은 학생들의 피끓는 기개(氣槪)는 1919년 동경(東京) 유학생들의 ‘2 ‧ 8 독립선언’에서 그 맥을 찾을 수 있다.

1919년 2월 8일. 이 날은 조국애(祖國愛)에 불타고 있던 동경유학생들이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원칙(民族自決原則)을 우리 조국광복의 기회로 삼고, 동경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대한(大韓)의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이 날, 600여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운집한 청년회관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그리고, 긴장과 흥분이 감돌았다. 여기서 최팔용(崔八鏞)의 역사적인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이 선언되고, 이어서 독립선언서가 백관수(白寬洙)의 감격과 흥분에 찬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이 이어졌다. “전항의 요구가 실패될 때에는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의 혈전(血戰)을 선포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慘禍)는 우리 민족이 그 책(責)에 임(任)하지 않는다”는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침묵 속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녀 600여명의 유학생들은 우래 같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나라 잃은 설음이 붇바쳐 올랐으리라.

적도(敵都) 동경에서 펼쳐진 2 ‧ 8 독립선언! 이 얼마나 장한 쾌거였던가. 또, 이 독립선언은 여기에 머물지 않았다. ‘2 ‧ 8 독립선언’의 의미를 널리 알리고, 거족적으로 확산시켜나가기 위하여 송계백(宋繼白)을 국내로, 이광수(李光洙)를 중국 상해(上海)로 파견하여 독립투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게 했다. 국내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애국지사(愛國志士)들은 감격과 자책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 ‧ 8 독립선언은 자연스럽게 3 ‧ 1 독립운동을 열매맺게 된다.

이 때,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젊은 학생들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신 것이었다. 서울에서는 연희전문학교 ‧ 보성전문학교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 경성의학전문학교 ‧ 경성공업전문학교 학생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경신 ‧ 중앙 ‧ 보성 ‧ 배제 ‧ 양정 ‧ 선린상업 ‧ 경성고보 ‧ 이화학당 학생들도 힘을 합쳤다. 평양의 숭실 ‧ 숭덕 ‧ 숭의 ‧ 숭현 ‧ 평양고보 ‧ 광성고보 학생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학생들의 참여는 전주 ‧ 군산 ‧ 광주 ‧ 대구 ‧ 부산으로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어디 그 뿐이 아니었다. 동경여자학원의 김마리아(金瑪利亞)와 동경여자 의학전문학교의 황애시덕(黃愛施德)도 귀국하여 3 ‧ 1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거족적인 항일운동(抗日運動)의 불길이 일었다.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를 낭독한다.

그리고,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한용운(韓龍雲)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대표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불길은 3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국외의 동포사회까지 확산되어 만주(滿洲) ‧ 연해주(沿海州) ‧ 미주(美洲) 등 우리 동포가 거주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일제(日帝)의 가증스러운 만행과 억압에 항거하는 우리 한민족의 독립만세소리는 전세계(全世界)로 퍼져나갔다. 만세소리에 일본도 놀라고, 세계도 놀랐다.

 

2 ‧ 8 독립선언과 3 ‧ 1 독립운동에서 보여준 대한의 젊은이들의 용기와 기개는 1926년 6 ‧ 10 만세운동으로, 다시 1929년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외침은 마침내 1945년 조국광복(祖國光復)의 열매를 맺는다.

 

이들 젊은 학생들의 그 위대한 정신은 영구집권을 꾀하던 자유당 정권의 종식을 가져온 4 ‧ 19 학생혁명으로 다시 되살아나지 않았던가. “지난 날 학생들은 일제(日帝)에 항거하고 멸공전선(滅共戰線)의 전위대열(前衛隊烈)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봉화(烽火)를 높이 들어야 한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 이는 청년학도들의 ‘민주의 함성’이었다.

이 얼마나 힘찬 외침었던가. 문득, 영국의 정치가 벤자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 1804 ~ 1881)가 남긴 명언이 머리에 스친다. “한 나라의 젊은이는 번영의 수탁자(受託者)이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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