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偏見 버리고 베푸는 이웃 되자
이제 偏見 버리고 베푸는 이웃 되자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4.1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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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偏見 버리고 베푸는 이웃 되자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4 ‧ 11 총선(總選) 기간 중에는 노원 갑(甲) 선거구에 입후보한 ‘나는 꼼수다’의 김용민 후보(민주통합당)의 ‘막말’ 파문으로 시끌시끌했는데, 선거가 끝난 지금에는 ‘이자스민 때리기’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마음이 한 없이 아프다.

이자스민은 4 ‧ 11 총선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필리핀 출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인과 결혼하여 대한민국에 귀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첫 외국인 공무원으로 ‘이주민(移住民) 지원업무’를 담당했던 바도 있다. 그리고, 현재는 이주여성(移住女性)을 위한 봉사단체인 다문화네트워크 「물방울나눔회」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移民者에 대한 偏見 버려야

 

4 ‧ 11 총선이 시작되면서 일부 네티즌들이 이자스민 후보를 향한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그 공격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불법체류자 무료 의료지원”, “외국인 유학생 장학금 지원”, “다문화가정 아이들 대학 특례입학”, “다문화가정 고향 귀국비 지급과 외국거주 가족 한국 초빙비용 지급”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는 것이 그 출발이었다.

그러나, 정당 투표로 당선이 결정되는 비례대표 후보는 개인의 선거공약은 없다. 그리고, 이자스민 또한 어떠한 공약도 내건 바가 없다. 그런데도 이런 터무니 없는 허위사실이 유포됨으로써 한 이주여성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있다.

이제는 그녀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그녀를 향한 공격은 더 노골적이다. “그녀의 공약을 이행하려면 4년간 2조235억원이 든다”, “불법체류자가 판치게 됐다”, “매매혼(賣買婚)이 늘어날 것”이라는 글도 퍼뜨려지고 있다.

더 심한 막말도 이어지고 있다. “매매혼으로 팔려온 ☓이 우리 역사도 모르면서 국회의원 한다고 까분다”, “이대로 되면 한국은 외국인 천국이 되겠네”, “대한민국의 등골을 빼먹는 다문화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등의 무차별적 공격의 글이 올라왔다.

이러한 공격의 화살이 쏟아지자 이자스민 당선자는 언론과 접촉을 피하면서, “앞으로 의정활동(議政活動)을 통해서 자신의 진심을 보여드리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당선 직후에 했던 “저는 대한민국의 며느리이자 대한민국 아이의 엄마”라는 말을 되뇌었다고도 한다.

 

현재 결혼 이주여성은 20만명을 넘었으며, 이들의 국적(國籍)은 170여개국에 이른다. 이처럼 결혼 이주여성의 수가 늘어나면서 이제 다문화가정(多文化家庭)은 우리의 이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최근 한 보도에 따르면, 2020년이 되면 우리나라 전체 가구(家口)의 20%가 다문화가정으로 구성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결혼 이주여성과 그들을 어머니로 둔 제2세들이 이웃의 곱지 않은 눈빛에 짓눌려 살아가야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큰 사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결혼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다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차별과 갈등’이 이제 우리의 큰 짐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부처님 말씀에 “남을 업신여기거나 따돌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큰 상처를 입게 된다”는 말이 있다. 우리 국민이 이러한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어디 그 상처뿐인가. 외국으로부터 ‘어글리 코라아’라는 손가락질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두렵다.

 

이제 베푸는 마음을 가지자

 

네티즌들의 인종차별적 공격을 감내하고 있는 이자스민의 안타까운 모습이 빈곤과 일제(日帝)의 억압에 짓눌려 살던 우리 선조(先祖)들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1869년의 기근(饑饉)으로 인해서 우리 선조들은 러시아로, 만주로, 일본으로 이주의 행렬을 이어갔다. 그러던 것이 1910년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국권(國權)을 상실하면서 경제적 이유에 정치적 이유가 보태어져서 해외이주(海外移住)는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의 경제적 착취가 극에 달하게 되고, 이로써 농토를 빼앗기고 일터를 잃은 농민과 노동자들이 해외이주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1869년 이후 이러한 사정 속에서 1898년 미국이 하와이(Hawaii)를 병합하고 그 개척을 위하여 동양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면서 한국인의 미국에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일 업난 첨군자들 보십쇼. 미리견국(彌利堅國)에 가서 4년만 일하면 널븐 땅을 줄 터이오. 뜻 잇난 첨군자난 ‧ ‧ ‧.” 이는 1902년 서울과 인천 등지에 나붙은 노동자 모집광고이다.

그 해 12월 22일, 101명의 노동자가 하와이를 향해 고국을 떠났다. 1903년에 1,133명, 1904년에 3,434명, 1905년에 2,659명이 뒤를 이었다.

이들 노동자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또는 파인애풀농장에서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의 한(恨)을 달래야만 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때로는 인종차별에 가슴 아파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찌 이 어려웠던 지난 날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일제 35년간 망국(亡國)의 설움을 가슴에 안고 나라 없는 백성으로 해외(海外)에서 방랑했던 우리 선조들의 한(恨)많은 삶을 기억하면서 결혼 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이것만이 우리 대한민국이 인간존중의 대국(大國)으로 우뚝 설 수가 있다.

 

문득,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Pestalozzi, J. H. : 1746 ~ 1827)의 묘비명(墓碑銘)이 머리를 스친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을 가슴에 담고, 결혼 이주여성과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당당하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포용하자. 그리고,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껴안아주자.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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