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문학콘서트로 대중과 만난 권영민 석좌교수
책과 문학콘서트로 대중과 만난 권영민 석좌교수
  • 김상천·이호연 기자
  • 승인 2012.05.02 16:11
  • 호수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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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의 어원은 서로의 의견을 아울러 이르는 공감과 소통


■ 책과 문학콘서트로 대중과 만난 권영민 석좌교수

콘서트의 어원은 서로의 의견을 아울러 이르는 공감과 소통
본원적 의미의 ‘문학콘서트’ 꿈꾼다


 

이상, 계속 살았으면 북으로 갔을 것
그처럼 세상을 독특한 눈으로 본 작가는 없어
대학생은 시 읽고 사물 보는 눈 키워야

최근의 두 책 『이상 문학의 비밀 13』(민음사), 『문학 시대를 말하다』(태학사)와 2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갖는 문학콘서트. 30년의 세월을 뒤로 강단을 떠난 권영민 석좌교수의 새로운 열정은 ‘대중과의 소통’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24일 죽전캠퍼스 상경관 연구실에서 권 석좌교수를 만났다.

▲책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특히 ‘마지막 자화상’의 주인공이 이상이 아니라는 점이나 호적을 통해 드러난 이상의 가족사는 기존 인식을 뒤집는 내용인데요.
“이상에 대해 알려진 것들 중에는 학자들의 추측성 지레짐작이나, 왜곡, 과장된 내용이 많습니다. 2009년 그의 전집을 내면서 잘못 알려지거나 빠뜨린 사실, 사실로 위장한 추측 등 오류를 바로잡고 이상 생애의 역사적 사실을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존에 사실이라고 알려진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조사했습니다. 가령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간 게 정말인지, 결혼한 것이 맞는지 등을 일일이 뜯어보고 대조했습니다.”

▲이상의 호적과 경성고공 학적부도 찾아냈더군요.
“그동안 아무도 이상의 호적을 찾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의 여동생이 신문 인터뷰에서 ‘이상의 남동생이 6.25 때 납북됐다’고 말한 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혹시 납치된 게 아니라 월북한 게 아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죠. 왜냐면 당시엔 월북자는 ‘이적행위자’로 분류해 호적을 별도로 관리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 겁니다.

그 생각이 맞았어요. 종로구청에서 붉은줄이 그어진 이상의 호적을 발견했습니다. 알고 보니 이상은 큰아버지 댁에 양자로 간 것이 아니었어요. 큰아버지가 둘째부인의 아들을 입적시키는 바람에 호주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학적부는 서울대 공과대학에서 찾아냈어요. 과거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서울대 공과대로 바뀌면서 그쪽에서 서류를 관리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껏 거기 자료가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어요. 찾아내서 보니까 이상은 수석졸업생이었어요. 그래서 총독부의 관리가 됐던 것입니다. 당시엔 수석졸업자는 정부 관리로 일하게 되는 제도가 있었어요.”


▲책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오감도가 떠올랐습니다. 소설가 이호철은 자신의 저서에서 “오감도는 필시 평론가들 골탕 먹이려고 그냥 어렵게 썼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대체 오감도는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문학이라는 것은 작가가 사물이나 삶의 현실을 바라보고, 거기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낸 것이죠. 그런데 이상은 사물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방법이 독특했어요. 우리는 보통 앉은 자리에서 뭔가를 볼 때 내 눈높이로 보잖아요. (생수병을 들어서 보여주며) 이렇게 ‘평창수’라고 써있고 물이 담긴 병, 이게 일반적인 우리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이상은 이걸 열어서 안을 보기도 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뜯어서 펼쳐보기도 하는,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 시각을 생각해 낸 거예요. 위에서 내려다본 생수병은 동그라미 두 개에 가운데가 파랗게 칠해져있는 모습이죠. 이상은 원 두 개를 그려놓고 병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해가 안 되고,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뭐냐?’고 말하죠. 우리 생각하는 생수병이랑은 전혀 다르니까.

이걸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상이 사물을 보는 시각을 제대로 감지했으면 우리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우리도 똑같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원 두 개지 뭐. 근데 그렇게 보지 못한 거죠. 이상이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봤는지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이상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썼을까요.
“음…. 아마 북으로 갔을 거예요. 이상의 친구들인 박태원, 이태준 등이 전부 월북·납북했으니까.”

▲북에서도 창작을 했을까요?
“글쎄요. 박태원 빼고는 북으로 간 작가들이 모두 숙청당하거나 몰락했으니….”

▲17일 문학콘서트에 서울 예장동 ‘문학의집서울’ 개관 이래 최대 인파가 모였다던데요.
“(허허허 웃으며) 다양한 독자를 만날 수 있어서 아주 좋았어요. 250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어요. 고등학생부터 80세 노인까지 연령층도 다양했고, 문학과 관련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30년 넘게 연구를 해왔지만, 내 연구는 일반 독자들보다 학자들, 결국 ‘동업자’들을 위한 영역 안에 머물렀어요.

서울대 교수직 퇴임을 앞두고 연구실에만 있었던 게 내 학자로서의 한계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중독자들과 함께 얘기하고, 독자들 생각도 들어보고 내 태도나 관점을 수정하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인터뷰에서 신문기자한테 ‘이런 걸 해보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기자가 ‘이걸 할 것이다’라고 써놓는 바람에 여기저기 전화가 와서 안할 수도 없었고…. (웃음)”



▲왜 우리 대학에서는 안 하십니까.
“안 그래도 가을에 우리 대학에서 문학콘서트를 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축제 기간 중이면 더 좋겠죠. 죽전·천안 모두 할 생각입니다.”

▲이상이 주제였던 1회 때는 김연수 작가가 왔었죠.
“우리 대학에는 아주 중요한 작가를 초빙할 생각이에요. 생각해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주제를 고민 중이에요.”

▲서울대 교수직 퇴임 후 쉬지도 않고 곧바로 연구와 문학콘서트에 착수했습니다. 열정의 원동력이 뭔가요?
“나는 작업을 조직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늘 2~3가지 연구를 책상에 두고 동시에 옮겨가며 합니다. 하나에만 집중해 너무 빠져들어 객관적 논리를 스스로 흩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뭔가 발견했을 때도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조금 놔두고 다시보고. 차분히 속도조절하고 관점을 수정할 여유를 찾죠. 근데 그러려면 굉장히 많은 자료를 섭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학원 때부터 그렇게 자료를 소중히 읽고, 꼼꼼히 정리하는 버릇이 든 게 원동력이라 생각해요.”

▲혹시 가족들이 서운해 하지는 않는지요.
““아버지처럼 재미없는 대학교수 전 절대로 안 하겠다.” 우리 아들 말입니다. (웃음) 전 항상 정해놓은 시간에는 어김없이 들어가 일을 해요. 가족들은 의례히 그러려니 생각합니다. 제가  방청소를 하고 있으면 처가 “아, 작업 하나 끝났소?” 하고 물어와요.”

“대신 저녁 먹고 나서 한 시간쯤 매일 걷습니다. 그때 항상 가족 중에 누구를 데리고 가요. 처와 많이 가죠. 그때 걸으며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나눠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건강이 중요한데, 건강에도 좋죠.”

▲대학생들이 어떤 문학작품을 읽으면 좋을까요.
“시를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소설도 좋지만 대학생 때 시집을 많이 읽는 것이 좋아요. 언어적 감수성과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시를 많이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언어 사용 능력과 사물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어요. 중요한 시인 리스트를 만들어서 한 달에 한 권씩 봤으면 좋겠어요. 시의 언어는 굉장히 고르고 고른 언어입니다. 언어에 대한 감각은 사물을 보는 감각이에요.”

인터뷰 : 김상천·이호연 기자 dkdds@dankook.ac.kr
사진: 윤한웅 사진기자 hwyuun89@dankook.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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