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정전
[백색볼펜] 정전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05.02 16:18
  • 호수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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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불 좀 꺼주세요

◇ 스무 살 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거스름돈을 건네는데 갑자기 불이 꺼지고 음악도 끊겼다. 정신없이 돌아가던 번화가에 정적이 흘렀다. 거리에서 다른 가게도 불이 나갔는지 보려고 나온 각종 알바생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거리 전체의 전기가 차단된 것 같았다. 길 건너 아이스크림 가게 누나가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나도 손을 들고 웃어줬다. 희한하게도 정전이 되자 손님들까지 갑자기 느긋해졌다. 손님들도 물건을 사다 말고 거리로 나와 주변을 살폈다. 종이 장부에 물건 값을 적느라 더뎌도 재촉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왠지 차분해진 것 같아보였다.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느닷없이 고요하고 차분해진 거리가 편안했다. 그때 이후로 가끔씩 정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토요일이던 28일 오후 2시 50분부터 오후 7시 10분까지 카카오톡이 갑자기 ‘정전’됐다. 4,400만 사용자는 4시간 동안 속이 탔을 것이다. 서버 과부하로 긴급점검 중이라 7시까지 서비스가 안 된다는 문구에 나는 기뻤다. 아싸, 드디어 정전이구나. 나는 카카오톡을 별로 안 좋아한다. 편리하고 유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싫다. 주변 사람들 편의를 위해 반 강제적으로 쓰고 있을 뿐, 지우고 싶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신문사만 아니었어도 진작 지웠을 것이다. ‘톡’하지 않아도 되는 4시간이 그렇게까지 좋을 줄 몰랐다. 4일 정도 안 됐으면 더 좋았을 텐데. 더욱더 많은 사용자가 카카오톡에 가입해서 더 지독한 과부하를 만들어 내주길.

◇ 더듬더듬 초를 찾아 불을 붙여놓고 가족 모두가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눴던 것도 따뜻한 정전의 추억이다. 만약 ‘세계 정전의 날’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쩔 수 없이 별로 열심히 살 수 없는 그런 날이 있으면 어떨까. 어쩔 수 없이 업무도 제대로 못 보고, 어쩔 수 없이 느긋하고, 우리가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각종 전자기기들은 새까맣게 꺼져있는 그런 날. 그건 정전(停電)이 아니라 정전(停戰)일 것이다. 사는 게 하루하루가 전쟁이라고들 하지 않나. 우리는 오랜만에 좀 쉴 수 있을 것이다.

◇ 그런 날이 정말 있으면 나는 아예 작정하고 기분을 내야겠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워야지. 그러면 하나 둘 불가로 모여 앉을 것이다. 나는 고구마 값으로 노래를 시킬 것이다. 사람 목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 저녁일테니까. 얼른 기타도 꺼내와야지. 타닥, 하고 장작 부러지는 소리와 솔솔 풍겨오는 고구마 익는 냄새를 맡으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소통은 그렇게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고요하고 캄캄한 저녁엔 어느 비오는 날의 새벽보다도 깊이 잠들 것이다. 세계 정전의 날 저녁엔 다들 푹 잘 수 있을 것이다.  <칙>

김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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