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오도답파여행 27. 효현을 넘어서
新오도답파여행 27. 효현을 넘어서
  • 김재관 연구교수
  • 승인 2012.05.02 16:20
  • 호수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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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 소박한 양식의 태종무열왕릉.

‘영천’에서 하루를 자고 ‘건천(乾川)’과 ‘금척(金尺)’을 지나온 이광수 일행은 ‘효현(孝峴)’을 넘어 경주로 갔다. ‘고현천’과 나란히 남쪽을 향해 평탄하게 놓인 도로가 ‘형산강(兄山江)’과 만나는 지점에서 물줄기를 멀리 하고 고갯길로 바뀌자 그들의 상쾌함은 고통으로 바뀌었다. ‘아화참(阿火站, 경주시 서면 아화리)’을 지나면서부터 신작로를 질주했지만, 급경사의 고갯길을 만나면서 자전거 페달을 힘겹게 저어야했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千辛萬苦로 急勾配의 孝峴을 내리니’라고 쓸 정도로 힘들어 하며 이곳을 넘어갔다. 무더운 여름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으니 그 고통이야말로 오죽했을까.        

‘솟티고개’라고 불리어졌던 이곳이 언제부터 ‘효현’으로 바뀌어 불리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1914년 일제는 행정지역을 개편하면서 우리말로 된 지명을 한자명으로 바꾸는데, ‘솟티고개’라는 이름도 이 때 바뀌지 않았을까? 예전부터 이곳은 경주와 내륙을 이어주는 주요 교통로였다. 신라인들은 배를 타고 형산강을 따라 바다로 갔고, 북쪽으로 뻗은 이 길을 통해 내륙으로 갔다. 지금도 이 길은 경주를 잇는 경부고속도로와 4번 국도가 지나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교통로이다. 이처럼 효현은 오래전부터 경주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 ‘경주 나들목’을 나온 차량들이 형산강을 건너 경주로 직행하고, ‘선도산’ 서쪽을 가로지르는 새 길이 열리면서 효현을 넘는 사람들은 예전에 비하여 현격히 줄었다. 그렇지만 천년고도 경주를 찾아가는 여행자라면 ‘효현’을 넘어야 한다. 이 길은 신라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길이며, 천년왕국 신라의 유적을 대면하는 길이다.

천년고도 경주여행은 이곳을 넘어서면서부터 시작된다.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태종무열왕릉과 만난다. 신라의 전성기를 열었던 태종무열왕의 능에서부터 신라의 역사적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백제를 병합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무열왕의 무덤은 그가 이룬 업적에 비하면 소박한 모양을 띠고 있다. 이곳을 찾은 이광수는 장식이 거의 없는 능의 모양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통일신라시대의 왕릉들을 떠올렸는지, “陵 周圍에 돌의 裝飾이 있을 듯하나, 지금은 그것도 埋沒되어 보이지 않고”라고 적었다. 그는 적어도 무열왕릉이 정교하게 다듬은 돌로 장식된 무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열왕을 ‘萬古英雄이자, 萬乘之君’으로 신라의 전성기를 이룬 왕으로 보았는데, 정작 지극히 소박한 형태의 무열왕릉 앞에서 그는 역사의 무상함을 느낀다.    

한편 이광수는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자신의 선조(先祖)들이 원망하고 욕하던 원수라고 생각한다. 전주(全州)가 본관이었던 자신을 ‘百濟人의 後裔’라 자처하면서, 백제를 멸망시킨 무열왕이야말로 선조들의 원망을 받았던 자라고 규정한다. 그렇지만 사람의 일은 역사와 함께 변하기 때문에 천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상의 원수를 논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 비판한다. 자신이 예의를 갖추고 무열왕을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구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광수는 모자를 벗고 무열왕릉에 사배(四拜, 왕에게 하는 절)를 하면서 감개무량함을 느끼는 자신에 대해 ‘大韓帝國人이었다가 白衣의 半島人이 된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국가를 잃은 조선인들과 패망한 백제 유민들의 이미지가 겹쳐졌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생각하는 백제와 신라의 관계는 먼 과거의 역사임에도 현재의 조선과 일본처럼 우승열패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으로 재현된다. 

김재관 연구교수
김재관 연구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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