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볼펜] 척척척
[백색볼펜] 척척척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05.08 12:25
  • 호수 1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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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떡쿵 찰떡쿵 철썩철썩 시원하게 척척척

◇ 나무 껍질인 척 / 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대장 노린재 / 앙상한 나뭇잎인 척 / 돌인 척 모래인 척 / 숨 참고 있는 나비박쥐, 강변메뚜기 / 나뭇잎에서 나무껍질로 모래로 돌로 / 거처 옮기는 동안 / 아픈 척 죽은 척 더러 사람인 척 / 보호색을 바꾸는 동안 // 새빨간 거짓말이 참말이 되면 어쩌나 / 은폐하고 경계하고 위장해도 /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어쩌나 / 시치미 떼고 딴청 부리다 / 온통 들켜버리면 어쩌나 // 낮잠 자다 눈 떴을 때 / 아무도 없는 정적 속에서 /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 천장의 사방연속무늬인 척 커튼인 척 / 벽에 걸린 그림인 척 커튼인 척 / 거울인 척 딴전 피우며 /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있는 누군가 / 햇살인 척 바람인 척

◇ 김혜수 시인(1959~ )의 <척>입니다. 척은 아무래도, 중요한 거 같네요. 욕먹어도 태연한 척, 지금은 곤란한 척. 열심히 듣고 있는 척, 너와 내가 동지인 척. 남과 다르지 않은 척, 편견 없는 척. 잘난 척하지 않는 척 겸손한 척, 이해해주는 척, 알고도 모르는 척. 사랑하는 척, 혹은 좋아하지 않는 척. 사회생활이라는 게 결국 척의 문제니까요. 인간관계에서도 척은 불가피하죠. 위선이나 가식이 싫다면 남과도 자신과도 끈끈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냥 척 하는 게 편할 때가 더러 있죠. 아니, 더러 솔직해질 때가 있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 그 척 말고 다른 척도 중요해요. 돈을 벌고 싶으면 척하면 척 해야 합니다. 부하직원이라면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을 줄 알아야하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철썩. 시키면 철썩철썩 시원하게 척척척! 상사라면? 무능한 직원의 척척척 해내는 척을 척 보면 알아야 하는 척 봐도 어려운 일을 척척 해내야 합니다. 저는 이 코너를 쓸 때마다 내가 글을 잘 쓰는 척, 생각이 깊은 척 해야 합니다. 결국 하나마나한 말들이라는 건 잠깐 생각하지 말아야하죠. 지금도 말장난이나 치고 있잖아요. 그저 좋은 시 하나 소개했다는 것으로 자위한다면 너무 치사한가요?

◇ 우리는 ‘나무 껍질인 척 나무에 들러붙어 있는 얼룩대장 노린재’일 수밖에 없는가 봐요. ‘보호색을 바꾸는 동안’ ‘새빨간 거짓말이 참말이 되는’ 일도 꽤 있죠. 제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기억들 중에 그런 게 많습니다. 어떤 게 진실인지 이젠 저도 모르겠어요. ‘은폐하고 경계하고 위장’하다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 결국 좋은 것만 남아요.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치사한 습성이 있어서요. 지나고 나면 어쩐지, 다 좋았던 것 같습니다. 그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온통 들켜버리는’ 때의 몸서리는 끔찍합니다. ‘거울인 척 딴전 피우며 내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 있는 누군가’는 결국 저였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죠.  <칙>

김상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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