端宗의 애절함이 베어 있는 寧越을 가다
端宗의 애절함이 베어 있는 寧越을 가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2.05.16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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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의 애절함이 베어 있는 寧越을 가다

 

권 용 우<명예교수 ‧ 법학>

 

 

며칠 전 제자 몇 사람과 함께 단종(端宗)의 애절함이 곳곳에 베어 있는 강원도 영월(寧越)을 다녀왔다.

1457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유배(流配)와서 생활했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7,8년 전에 이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지만, 역사 속의 장면들을 다시 더듬어보고 싶은 충동을 가슴에 담고 이 곳 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첫 목적지는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 : 강원도 기념물 제5호)였다.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에 자리잡은 이 곳 청령포는 단종이 1457년(世祖 3년) 6월에 유배와서 한숨으로 나날을 보냈던 곳이다.

 

王邦衍의 心情도 애절하구나

 

청령포! 동 ‧ 북 ‧ 서쪽 3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 쌓여 있었으며, 육지와 이어지는 남쪽은 가파른 절벽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 있었다. 동서(東西) 3백척, 남북(南北) 4백9십척. 이 좁은 곳이 왕위(王位)를 찬탈(簒奪) 당하고 유배온 단종이 살았던 생활공간이었다.

금표비(禁標碑) ‧ 노산대(魯山臺) ‧ 망향탑(望鄕塔) ‧ 관음송(觀音松) ‧ 단종어가(端宗御家)! 이 곳에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젖어있었다. 어린 단종이 노산대에 올라 왕비(王妃) 송씨(宋氏)를 생각하면서 쌓았다는 망향탑을 바라보니 단종의 심정을 헤아릴 듯 하였다.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觀), 들었다(音)’는 관음송은 그 당시를 증언이라도 하는 듯 옛 모습 그대로였다.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앉아서 시름을 달래었을 단종의 애처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이 곳 청령포 나루터에 자리한 왕방연(王邦衍)의 시조비(時調碑)가 나의 발길을 멎게 했다.

 

“천만리 머나먼 곳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조는 왕방연이 금부도사(禁府都事)의 신분으로 단종에게 내려진 사약(賜藥)을 가지고 이 곳에 왔다가 한양(漢陽)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령포 나루터에 앉아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읊은 것이라고 한다.

 

관풍헌(觀風軒)에 얽힌 사연도 기구했다. 이 곳은 영월 관아(官衙)의 객사(客舍)인데,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홍수(洪水)를 피해 이 곳으로 거처(居處)를 옮겨 생활하시다가 1457년 10월 24일 세조(世祖)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승하(昇遐)하신 곳이라고 한다.

관풍헌 앞쪽에 자리잡은 자규루(子規樓)에 올라서 단종의 쓸쓸한 옛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 누각의 본래 이름은 매죽헌(梅竹軒)이었는데, 단종이 이 누에서 애절한 자규사(子規詞)와 자규시(子規詩)를 읊은 곳이라는 데에서 ‘자규루’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니 그 이름 또한 예사롭지 않다.

 

“달 밝은 밤에 두견새 두런거릴 때

시름 못잊어 누대에 머리 기대니

울음소리 하도 슬퍼서 나 괴롭구나

네 소리 없다면 내 시름 잊으련만

세상 근심 많은 분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춘삼월엔 자규루에 오르지마오.”

 

자규사가 나의 마음을 한없이 아리게 했다.

인륜(人倫)을 저버린 왕위찬탈(王位簒奪). 왕의 자리가 무엇이길래, 어린 조카를 죽이기까지 했단 말인가. 500여년 전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문득,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말콤 엑스(Malcolm X : 1925 ~ 1965)가 남긴 명언(名言)이 떠오른다. “권력은 결코 뒷걸음질하지 않는다. 오직 더 큰 권력으로 향할 뿐이다.”

 

권력을 향한 마수(魔手)에 걸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가 어찌 단종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문종(文宗) 임금의 고명(顧命)을 받아 12세의 단종을 보필하던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 좌의정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성삼문(成三問) ‧ 박팽년(朴彭年) ‧ 하위지(河緯地) ‧ 이 개(李塏) ‧ 유응부(兪應孚) ‧ 류성원(柳誠源)도 참형(斬刑)하지 않았던가.

 

“북소리 목숨앗길 재촉하는데

머리올려 바라보니 해도저무네

황천(黃泉)엔 객점(客店) 하나 없다 하거니

오늘밤 뉘 집에 가 잠을 자리오.”

 

성삼문이 형장(刑場)으로 끌려가면서 읊은 시조를 뒤로 하고, 어린 단종이 잠든 장릉(莊陵 ; 史蹟 제196호)을 참배하면서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의 충절(忠節)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았다.

동강(東江)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한 밤중에 남의 눈을 피해 장사지낸 곳이 이 곳 노송(老松)이 울창한 장릉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곳이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의 명당(明堂)이라니! 후세 사람들은 어린 나이에 비운(悲運)의 죽임을 당한 단종이 편히 쉬시라고 하늘이 내린 자리라고 한다니,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다.

부디 명복(冥福)을 누리소서.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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